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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69화 "불의 고리"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3.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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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경, 너무 많이 뒤처진 것 아니오? 따라잡을 수 있겠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리안 남작님. 이들은 성이나 도시, 마을을 이용할 수 없을 겁니다. 확인 안 된 수백의 행렬을 아무 조사나 검사 없이 들이지는 못할 테니까요. 저희는 가도를 따라 이동할 수 있으니 속도 면에서는 저희가 훨씬 앞설 수 있습니다."

"호오, 그대의 말이 맞소. 그대만 믿겠소 미하일 경."

“속도를 조금 높여야겠습니다, 저와 영주군은 우선 가도를 따라 먼저 이동하겠습니다. 방향이 갈리는 지점에

 알아보실 수 있게 표시를 해둘 테니 수비군을 끌고 뒤따라와 주십시오.“

비록 한참을 뒤처지긴 했어도 미하일의 판단은 정확했다. 우리는 성과 도시 그리고 마을들을 이용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용할 수 못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성과 도시, 마을들을 이용한다면 첫째로 우리의 동선이 들킬 것이고, 그보다 미하일의 추측처럼 수백명이나 되는 미상의 무리를 아무 조사나 검사 없이 안으로 들일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미하일은 병력을 나누어 자신이 데려온 영주 직속 부대만 이끌고 먼저 출발하였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자신이 직접 체계적으로 훈련한 영주군은 도시의 수비대보다 이동속도도 빨랐고, 아직 체력도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대 전체가 같이 이동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이끄는 부대만 데리고 이동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란 판단이었다. 이것은 토벌군에 있어서는 아주 탁월한 판단이었고, 나로서는 차마 예상치 못했던 점이었다.

토벌군은 두 개의 부대로 나뉘어 이동을 시작했다. 산속에서의 속임수로 우리는 열흘을 벌었지만, 이동을 시작한 영주군은 가도를 따라 매우 빠른 속도로 북상하며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미하일의 부대는 우리를 따라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잔뜩 독기가 오른 상태였다. 지속해서 병사들을 독려해가며 무작정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않은 채 강행군을 지속하였고 피로가 누적되어 더 이상 걷기 힘들 정도가 아니라면 하다못해 마을에도 들르지 않고 체력이 버텨주는 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따라붙었다.

“보고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루 정도 거리에 신원 미상의 수백 무리가 포착되었습니다.”

“좋았어, 다 따라잡았군. 전군! 이곳에서 반나절 간 휴식한다! 전투 전 마지막 휴식이니 경계는 없다 각자

 감각 을 열어둔 채 최대한 회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일주일간의 혹독한 강행군 끝에 미하일의 부대는 우리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미하일의 부대와 우리의 거리는 이제 하루 남짓한 거리였다. 여태껏 왔던 것 처럼 급속 행군을 강행한다면 대략 반나절이면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기다리던 보고를 들은 미하일은 이제 다 되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부대에 전투 전 마지막 휴식을 지시했다. 어차피 도망치는 우리들이 갑자기 선회해 자신들을 급습할 리 없었기에 경계도 따로 두지 않았다. 그간의 굴욕을 설욕할 다음 날 있을 전투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해 준비할 뿐이었다.

“이제 적들이 코앞에 있다! 저들은 우리가 두려워 도망치기 바쁜 자들이다! 가자! 영주의 병사들이여 나의 병사들이여! 저들의 피로 그간의 굴욕을 씻어내자!!!”

“와아아아아아!!”

미하일의 예상대로 밤사이 우리의 습격은 없었다. 경계도 서지 않은 채 충분한 휴식을 취한 미하일의 부대는 그간 고된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를 어느 정도는 풀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병사들이 어느 정도 피로를 회복한 것을 확인한 미하일은 짧은 연설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우리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이 분했는지 피곤함과 별개로 눈가가 벌겋게 충혈된 것이 독기들이 가득해 보였다. 그렇게 미하일의 짧은 연설로 인해 사기까지 충전한 이들은 정말로 우리를 단 한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마지막 급속 행군을 시작하였다.

미하일의 부대와 우리가 위치한 이곳은 제국 서부에 위치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넓이의 평원지대다. 다만, 아무래도 울부짖는 숲이 근처에 있다는 영향인지 평원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쌀이나 보리 같은 작물을 키우기에는 척박하여 적합하지 않아 방치된 땅이었고, 개간되지 않은 단단한 흙의 땅과 발목 높이까지 자란 관리 안 된 잡초들이 무성한 평원이었다.

그래도 평원지대인 만큼 시야가 탁 트인 개활지라 가시거리가 넓었다. 그렇기에 반나절 정도의 급속 행군으로 미하일의 시야에 우리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이 코앞이다!! 전군 전속 전진!! 적의 후미를 쫒아라!!”

미하일이 이끄는 부대의 시야에 우리가 잡히기 시작하자 미하일은 드디어 다 따라잡았다는 생각에 흥분하였고 최대 속도로 쫒는다면 한두시간 이내에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부대에 전속력으로 전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병사들 또한 이제 진짜 그간의 설욕을 할 수 있단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지, 미하일의 지시가 떨어지자 대열을 흩트리며 무작정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의심했어야 했다. 불과 전날 저녁에도 하루 걸리는 거리에 있던 우리가 왜 지금껏 이동하지 않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조금만 냉정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바라본다면 말이 되지 않는 점 투성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다 죽여버려라!!”

“아아아!!! 다 죽이겠다아아아!!!”

전날과 다름없는 거리에 위치한 우리들,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병사무리들을 보고도 지금도 움직이지 않는 우리들을 단 한 번, 단 한명이라도 의심했어야 했다.

지휘관마저 이성을 잃을 만큼 과도한 흥분으로 인해 전속력으로 전진하는 부대는 이미 진형이 무너진 지는 오래였다. 제각각 눈이 벌게져 오로지 우리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각자의 전속력으로 뛰어올 뿐이었다.

만약 미하일이나 아니면 다른 하급 지휘관 중 한명이라도, 산에 돌입했을 때의 반만큼이라도 경각심을 가지고 천천히 접근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잔뜩 독기가 오른 그들의 눈앞에 멈춰있는 우리는 훌륭한 미끼였고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먹으려 달려드는 그들은 또 한 번 방심에 대한 결과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화륵.’

“어, 어, 어!! 불이다!!! 밀지 마!!!”

평원에 서 있는 우리에게서 작은 불꽃이 일렁였고, 그 작은 움직임 하나로 미하일의 부대가 우리에게 거의 근접해 올 때쯤 평원에서 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볍게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불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미하일의 부대와 우리 사이에 거대한 불의 장벽을 세워버렸다. 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달려드는 미하일의 부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앞서 달리던 병사들이 갑작스레 일어난 불의 장벽을 보고 당황하며 멈춰서기 시작했으나 불의 장벽을 보지 못한 채 무작정 뛰던 뒤이어 달려드는 병사들이 도착하며 밀기 시작했고 미하일의 부대는 그렇게 불의 벽 앞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평원에서의 전투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적의 화공이다. 물론 태울 것이 훨씬 많은 산악의 화공이 더 위협적이겠으나, 산악의 화공은 불이 어디로 옮겨붙을지, 옮겨붙은 불이 언제 자신의 부대를 향할지 가늠이 안 되기에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화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위협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평원의 화공이다. 거기에 화공은 아주 소수의 병사로도 훨씬 많은 수의 적에게도 단 한 번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안겨줄 수 있기에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미하일이 그저 멍청하기에 젊은 혈기로 인해 앞뒤 분간 못하기에 화공에 걸린 것은 아니다. 지금의 계절은 한창 꽃 피는 봄이 지나 여름이 접어드는 계절이다.

아무리 관리가 안된 잡초라 해도 봄의 단비와 여름의 습기로 인해 풀들이 가장 많이 수분을 머금고 있을 시기이기에 일반적이라면 화공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기에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는 하루 반나절 동안 괜히 이곳에 있던 게 아니었다. 미하일이 부대에서도 발이 빠른 자들 몇몇을 정찰조로 세워 우리의 위치를 파악했던 것 처럼 우리 또한 뒤를 감시하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하일의 부대가 우리를 따라잡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목표로 한 목적지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대로 서두른다 해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뒤를 잡힐 것이 분명했기에 이곳에서 그들의 추격을 어떻게든 뿌리쳐 냈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그들이 하루를 휴식하는 동안 이곳에서 그들을 막을 준비를 하였다. 단단한 흙을 조금씩 파내어 도랑을 만들었고 도랑 군데군데 기름 주머니를 놓고 불이 잘 붙게 하기 위해 기름먹인 옷가지들도 비치해 두었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미하일의 부대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따라잡았다 좋아하며 눈이 뒤집힌 채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대 이상으로 그들은 진형까지 어그러지며 달려들었고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랑에 불을 붙였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잡초가 무성한 봄의 평원이라 하더라도 평원에서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불의 고리는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하루 동안 우리는 이것만 준비하진 않았다. 한껏 수분을 머금을 풀들에는 불이 잘 옮겨붙지 않기에 이대로라면 금방 불은 꺼질 것이고 불이 꺼지면 우리는 공격당할 게 뻔했다. 그래서 준비한 게 바로 화염병과 기름 주머니들이었다.

사실상 뉴란드 대륙에는 마법이라는 훨씬 편하고 유용한 대체 수단이 있기에 기름은 저렴했고 흔했다. 돈이 든다고 하지만 불로 할 수 있는 대부분이 아티팩트로 대체가 가능하기에 조금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굳이 머리 아픈 기름 냄새와 타는 냄새를 맡아가며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름은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필수용품이었다. 여름의 습기 먹은 나무로 화로를 피우기 위해서도, 어두운 밤에 빛을 밝히기 위해 랜턴이나 횃불을 만들 때도 기름은 서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 물품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행렬에 기름은 충분했고, 물주머니나, 물병, 수통 등에 기름을 담아 충분한 양의 화염병과 기름 주머니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로는 매우 손쉬웠다. 흐트러진 진형, 봄철 높게 솟은 불의 벽, 이성을 잃은 지휘관과 병사들 그들 머리 위로 화염병과 기름 주머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물!! 누가 불 좀 꺼줘!!’

“방패들 들어라!! 진형을 갖춰!!!”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들은 하찮은 것들이었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현세의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전장의 경험이 많은 알프 조차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살짝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화염의 벽에 갇혔던 미하일의 부대는 처음에 뒤에서 밀려서 화염의 벽에 다가선 몇몇을 제외하고 큰 피해가 없었다. 미하일 또한 봄의 평원에서 벌어진 화공을 보고 놀라긴 했지만 멍청한 짓이라 평가하며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불은 금방 꺼질 거라 방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방심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화염병과 기름 주머니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들은 회심의 화염 벽으로도 자신들의 피해가 거의 없자 우리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아무 물건을 집어 던진다 생각했던 듯 했다. 그들은 쏟아지는 물건들을 보고도 진형을 갖추고 방패를 들어서 막아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의 머리 위로 무게가 조금 더 무거운 기름 주머니들이 먼저 떨어졌고, 대다수의 기름 주머니는 그저 ‘철푸덕’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지만 몇몇은 주머니의 뚜껑이 헐거워 안의 기름이 흩뿌려졌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주변의 화염 벽으로 인해 나는 기름 냄새라 생각했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윽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염병들이 뒤늦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삼백 명이 집어던지는 기름 주머니와 화염병 세례는 한두 번의 투척만으로도 전장을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머니와 다르게 유리병과 나무 병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방패를 들어 올린 몇몇 병사들의 방패에 화염병이 깨지며 불꽃을 뿌렸고, 뿌려진 불꽃은 주머니에서 새어 나왔던 기름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그들이 있는 땅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떨어졌던 기름 주머니들이 끓다 못해 작은 폭발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눈앞의 참극이다. 미하일의 병사들은 어느 하나 멀쩡한 사람 없이 전부 몸에 불이 붙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빴고, 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다 그 채로 화염 벽을 뛰어넘는 자들도 나왔다. 하지만 황량한 벌판에서 물을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고 얼마 가지 않아 바닥에 몸을 뉘었다.

곳곳에선 타는 냄새와 고기 익는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이 무고한 살생은 피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자의던, 타의던 이들은 제로스와 부하들 그리고 나아가 영주의 폭정으로 어쩔 수 없이 숨어지낸 노인들까지 모두를 체포가 아닌 토벌하려 했다.

애초에 이들의 생각에 포섭, 회유, 체포 따위는 없었고 그저 영주의 뜻에 반하는 자들을 모조리 도륙할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이 멀리까지 따라온 것이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끝나지 않을 일이었고, 나는 제로스와 백성들을 택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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