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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229화 "드리쿨 병"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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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협상은 없었네.”

“협상이 없이 어찌...”

“‘투르칸은 어느 날 갑자기 반 연맹에게 손을 내밀며 브람스에 내전은 없다고 했다. 그날 이후 투르칸과 투르칸을 따르는 세력은 더 이상 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사막에서 물을 필요로 하지 않다니...”

확실히 냄새가 나긴 했다. 마왕의 시대, 어떤 이가 마족과 계약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은 마족이 대륙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던 시기다.

아마 브람스에 도래한 전례 없는 건기 또한 마족들의 수작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투르칸과 그 세력들까지 솔직히 마족과 관련이 없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근데 그건 수천 년 전 과거의 이야기지 않습니까? 당대의 마왕과 마족은 사라졌었고, 지금과의 연결점이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 말이 맞소. 콜록. 당대의 투르칸이 마족과 계약했다 해서 지금의 투르칸이 마족과 계약했다 할 수 없지.”

“혹 다른 의심이 가는 사안이 있으신 겁니까?”

‘드르륵’

“?!”

“콜록. 혹 드리쿨 병에 대해 아시오?”

리만 브루칸이 하는 이야기는 나도 몰랐던 역사였던 만큼 놀랍기도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알다시피 마족이라는 것은 유전되지 않는다.

듀발 후작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있긴 하나 일반적이지 않고, 그것은 마족과 계약했다기 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졌다 볼수 있는 사안이다.

그리고 듀발 후작의 경우나, 뿔이 솟은 자를 따라다니는 광신도 무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외형적 차이를 빼고는 그들은 마족과 같은 특별한 능력도 없었기에 보통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설사 만약 당대의 투르칸이 마족과 인간의 혼종이 되었었다 하더라도 그를 따르던 세력 전체가 갑작스레 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아마 상황을 추측해 보자면 당대의 투르칸은 브람스에 찾아온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자 마족과 계약을 했을 것이었고 그 계약은 그 과거에서 끝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내 합리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리만 브루칸은 기분이 나쁘거나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그저 말없이 자신과 우리를 막고 있던 천을 걷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저택의 관리자가 매우 놀라는 걸 보았고, 리만 브루칸의 목소리를 따라 다시금 고개를 돌려 보게 된 그의 모습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것이 드리쿨 병의 말로입니까?”

“맞소.”

“세간에는 폐가 굳는 병이라 들었습니다.”

“잘못 알려진 것이지. 이 병은 마족에게서 기인한 병이오.”

“!!”

모습을 드러낸 리만 브루칸은 붉은 눈동자와 더불어 신체의 절반 이상이 미이라 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겪는 증상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처음부터 그의 잦은 기침이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다. 다른 곳이면 모를까 이런 뜨거운 사막에서 감기에 걸렸다는 건 납득하기 힘든 일이니 말이다.

내 질문에 리만 브루칸은 순순히 자신의 상태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상상도 못 할 대답을 내놓았다. 단순히 남부의 풍토병인 줄 알았던 드리쿨 병이 마족에게서 기인했다는 이야기였다.

“마족 말입니까?”

“그렇소. 내가 찾은 과거의 기록에 의하면 드리쿨 병은 마왕의 시대에 처음 발병되었고, 물이 필요 없어진 당대의 투르칸 세력에서부터 시작된 병으로 알고 있소.”

“무례를 무릅쓰고 묻겠습니다. 그럼 리만 브루칸 님도 마족과 연관이 있으신 겁니까?”

“연관이라...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콜록. 아마 나뿐만 아닌 다른 대 부족장들도 마찬가질 걸세.”

“네? 대체...”

“어느날 연맹장 리라프 투르칸이 대 부족장들을 모아 연회를 베푼 적이 있지. 콜록. 으레 있던 단순한 단합인 줄 알고 대 부족장들은 자신들의 측근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연맹장의 부름에 응답했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가 드리쿨 병에 걸려버렸지. 콜록. 솔직히 리라프 투르칸이 마족이란 것을 확신할 수는 없소. 콜록. 하지만 연회를 주최한 이가 투르칸이었던 만큼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알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연맹장 리라프 투르칸을 조사해보겠습니다.”

“고맙소.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사크리파에 들어가는 것 까지는 도울 수 있소, 다만 그 이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이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듣게 된 이야기는 놀라운 사실의 연속이었다. 드리쿨 병의 원인과 시작은 수많은 연구와 조사가 이뤄졌지만, 학자들도 명확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드리쿨 병이 있었다는 기록만 있지 사실상 지금에 와서는 그 환자들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빅토르의 경우에도 자신이 드리쿨 병에 걸린 것 같다 할 뿐이었지 솔직히 공인된 바는 아니었다.

드리쿨 병은 어느 순간 나타나 브람스를 집어삼켰고 어느 순간 감쪽 같이 사라진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질병이다. 근데 아직까진 추측이긴 하지만 리만 브루칸에 의해 그 기원을 알게 된 것이다.

거기다 또 한 가지 놀랄만한 사실은 지금 브람스의 수뇌들이라 할 수 있는 모든 대 부족장과 그 측근 그리고 가족들까지 심지어 연맹장 세력 또한 모두 드리쿨 병에 걸렸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드리쿨 병의 말로가 죽음이기 때문에 시기를 놓치면 브람스는 거의 무정부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제국인인 내가 타국인 브람스가 어찌 되든 신경을 쓸 바는 아니지만, 마족의 위협이 코앞으로 다가온 때 브람스가 무너지면 안 되었다.

수뇌가 모두 죽으면 브람스 내부로 마족들이 스며들기 쉬운 것은 둘째치고라도 유지되었던 대륙의 평화가 깨지며 다시 한번 대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족을 앞에 두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런 대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리만 브루칸의 의뢰를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반적인 질병이라면 모를까, 겁쟁이 페로나 때가 그러했듯 마족에 기인한 모든 것은 그 마족이 죽으면 자연스레 사라진다.

리만 브루칸을 보면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된 만큼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병을 퍼뜨리는 마족을 죽여 병의 근원을 없앤다면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나는 리만 브루칸의 의뢰를 수락했고 우리는 리만 브루칸과의 대화를 뒤로하고 원래의 감옥으로 돌아왔다.

“연맹장은 어떻게 만나실 생각입니까.”

“연맹장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에요?”

“그래, 일국의 왕에 가까운 사람이다.”

“아아... 데일 오빠 진짜 그럼 연맹장을 어떻게 만나요? 또 저를 통한 미인계?”

“아서라, 리만 브루칸이 특이한 거지 연맹장은 꼬맹이 취향이 아니야.”

“뭐라구요? 꼬맹이? 저도 다 컸거든요?!”

“에휴,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있어.”

감옥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부터 말이 적었지만 최근 들어 말이 더 적어진 알프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어왔다.

솔직히 상황이 가만히 놔둘 수 없기에 수락하긴 했지만 나도 딱히 방법이 있어 수락한 것은 아니다. 일단 대 부족장인 리만 브루칸과 달리 연맹장 리라프 투르칸에 대한 정보가 적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부랴부랴 그 방법을 강구하려던 찰나, 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셀시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잠시 놀리자 발끈한 셀시는 자신의 몸 라인을 내어 보이며 다 컸다며 한번 보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한 번의 농담뿐인데 연신 정신 사납게 구는 셀시를 타박한 뒤 나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의심을 사지 않고 연맹장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내 주된 관심사였다.

만나기만 한다면 그가 마족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적어도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속도를 줄여라!! 닻을 내려라!!”

‘덜컹, 덜컹, 덜컹’

“이건 어디에 둡니까?”

“저쪽 창고 옆에 둬라.”

리만 브루칸과의 대화 종료 이후 여명이 떠오를 때 즈음 다시 찾아온 저택 관리인에 의해 우리는 바로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택 관리인은 우리를 선착장에 있는 한 창고로 안내했고, 창고에 몸을 숨기고 있던 우리는 해가 뜨자마자 사크리파로 가는 정기선에 탈 수 있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습격하는 사적들도, 사해 생물도 없었고 사막의 날씨도 변덕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순조롭게 사크리파로 향했다.

저 멀리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선장의 지시하에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크리파 선착장에 배는 도착했다.

선착장에 정박이 완료되자 선장과 선원들의 안내로 정기선에 탔던 탑승자들이 하나둘 내려 사막의 심장 사크리파의 땅을 밟았다.

그렇게 탑승객들이 모두 내릴 동안 우리는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아니, 내리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나와 알프 셀시 우리는 배의 화물칸에 실린 통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리만 브루칸이 문제없이 사크리파에 들여보내 준다고 했던 만큼 이런 방식으로 사크리파에 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원활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있는 듯 없는 듯 유령같이 들어가는게 낫다는 내 이야기에 따라 리만 브루칸이 지금과 같은 또 한 번의 밀항을 준비해준 것이다.

번거롭지만 이렇게 들어온 이유는 우선 나와 알프 셀시 모두 한눈에 봐도 브람스인이 아닌 게 티 나는 외모로 공식적인 절차로 들어와 활동한다면 많은 주목을 끌게 된다.

그리고 주의를 많이 끌게 된다면 연맹장 리라프 투르칸을 조사하는 데 편한 점 보다 불편한 점이 더 많을 것이었다. 

하나 더 몰래 들어와서 좋은 점은 우리가 여기서 어떤 깽판을 치더라도 리만 브루칸에게 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람스 수뇌부에 드리쿨 병이 퍼져 연맹장과 대 부족장들 사이에 서로서로 의심하는 기류가 만연한 지금, 리만 브루칸이 신원을 보증한 우리가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아마 브루칸은 바로 내전에 접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몰래 숨어든 만큼 단점도 존재하긴 한다. 또다시 밀항한데다 우리의 편이 없는 사크리파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다소 큰 단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통통’

‘통통’

“나오셔도 됩니다.”

‘우드득’

“후아, 살겠다.”

승객들이 모두 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통에 담긴 채로 선원들에게 들려 사크리파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렇게 선착장의 한구석에 놓인 우리는 또다시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무통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던 햇빛이 거의 꺼져갈 때 즈음 누군가 조심스레 통을 두드렸다. 신호를 받은 나 또한 신호로 답했고 그제서야 우리는 통에서 나올 수 있었다.

타르킨토에서 사크리파까지 거진 열흘, 물론 통 안에서만 있던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들을 제외하고는 거진 통 안에 있어야 했던 만큼 통에서 나오자마자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감사합니다.”

“브루칸님이 시키신 대로 배에서 통을 내려 놨을 뿐, 저는 여러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아, 한가지 브루칸님의 전언입니다. ‘사크리파에 도착하면 람비스 카라반을 찾아라.’ 이상입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헤 바깥에서 단단히 밀봉한 통을 열어 우리를 꺼내어준 선원은 내 감사 인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저 통을 내렸을 뿐 모르는 일이라 둘러대었다.

선원의 복장을 하고는 있지만 말투나 행동을 보자면 딱 봐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 같아 보였다. 아마 리만 브루칸의 첩자 중 한명인 듯 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연맹제로 운영되는 브람스는 앞서 말했듯 독립된 여러 작은 왕국들이 모여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연맹이란 이름 아래 강한 결집력으로 뭉쳐있지만, 사람 욕심이란 게 평화의 시대일수록, 자신의 우방일수록 더욱 경계하기 마련이다.

그런 만큼 리만 브루칸 뿐 아니라 다른 브루칸들이나 투르칸 그리고 작은 부족들을 이끄는 라흐만이나 타르만 또한 많은 수의 세작들을 운용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쨌든 현실로 돌아와서 선원은 우리에게 리만 브루칸의 전언을 전해주고는 빠른 속도로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리만 브루칸의 배려와 준비성에 고마움을 느꼈다. 솔직히 사크리파에는 우리를 도울 사람이 없을 것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람비스 카라반이 사크리파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맨땅에 헤딩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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