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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233화 "잠입 그리고 탈출"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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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궁, 쾅.’

“이리 앞으로 와 서거라.”

‘저벅, 저벅, 저벅’

내가 들어서자마자 작게 열린 문틈은 순식간에 다시 닫혀버렸다. 그리고 조금 전 들려왔던 중후한 목소리를 따라 나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투르칸의 방은 길쭉하게 생긴 통로형 공간 가운데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었다. 아마 카페트 좌우의 공간은 투르칸의 측근들이 서는 자리인 듯 보였다.

그리고 길게 놓인 카페트의 끝자락엔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가 놓여있었고, 그곳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아마 그가 투르칸일 것이다.

늦은 시각이라 내부가 어둡기도 했고, 내부의 조명이 은은하게 켜있기도 하고 연맹장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묘하게 역광이 향하도록 배치된 조명 때문에 투르칸의 실루엣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도 투르칸의 방에 들어선 것은 나 혼자였다. 그나마 이것은 사전에 바탈린에게 이야기를 들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변장하는 와중에도 여러 바탈린들에게 여성이 걷는 법에 대한 강의를 줄줄이 듣기도 했고, 무기술같이 복잡한 움직임이 아니라면 내가 가진 재능이 나쁘지 않아 제법 요염한 성인 여성을 걸음걸이를 흉내 낼 수 있었다.

‘삭’

“사막의 중재자 투르칸님을 받듭니다.”

“혼혈치고 제법 브람스 예법에 밝구나.”

“!!, 오기 전 바탈린에게 교육을...”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니 애써 해명할 필요 없다.”

바탈린들의 변장술은 외적인 변화에서 끝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독초를 배합한 환을 내게 건네며 복용하면 성대의 근육이 풀어지며 잠시간이나마 목소리까지 변조가 가능하다 알려주었다.

카페트를 따라 이동한 나는 투르칸의 의자와 스무보 정도 거리를 둔 거리에서 멈춰 한쪽 무릎을 꿇고 양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예를 취했다.

그런 나를 보며 투르칸이 말했다. 실책이었다. 토종 브람스인에게서는 금발이 나올 수 없다. 브람스인은 구릿빛 피부색으로도 구분이 되지만 피부색과 비슷하게 흑색, 적색, 갈색 등 비교적 짙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다.

대륙 전체적으로 보아도 남부 왕국은 대부분 구릿빛 피부와 단색의 짙은 머리색을 지녔고 북부로 갈수록 밝은 피부와 같이 옅고 밝은색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원래의 내 머리에 길이를 덧붙인 가짜 머리긴 하지만 브람스인에게서 나온 금발은 바로 혼혈을 뜻한다.

또한 앞서 말한 적 있듯이 브람스는 과거 드리쿨 병의 확산으로 인해 외지인의 정착을 꺼리다 보니 당연히 혼혈의 숫자가 많지도 않고 혼혈에 대한 평판이 좋을 리 없다.

대부분의 혼혈은 원정 온 매춘부의 사생아들이 많고 그게 아니라면 이쪽저쪽에서 브람스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자제들이다 보니 출신이 어쨌든 브람스 내에서 신분 또한 당연히 높을 수 없다.

그렇다 보니 혼혈들은 대부분 빈민가나 슬럼가를 전전하는 하층민이고 당연히 브람스의 전통 예법 또한 알 턱이 없다. 그런 와중에 내가 브람스의 귀족들이나 하는 예법을 취하니 투르칸이 의아함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당황한 나는 애써 변명을 둘러대었지만 투르칸은 괜찮다고 말할 뿐이었다. 비록 그의 괜찮다는 말이 관심이 없어서인지 진짜 의심하지 않아서 인지는 몰라도 다행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오도록 하라.”

“예.”

“정말이지 생기가 넘치는 금발이구나.”

‘스스스스스’

투르칸의 지시에 따라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다섯보 정도 걸어갔고, 조금 더 가까이 오라는 말에 따라 더 이동한 나는 투르칸과 다섯보 정도의 거리에 멈춰서 다시 자세를 낮췄다.

투르칸이 연맹장이라고는 하나 일국의 왕에 준하는 사람인 만큼 아무리 새로운 취향에 눈떴다 한들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이를 이 정도 거리까지 들인다는 것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장소 또한 이상했다. 단순히 성적 만족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이곳이 아닌 개인 침실로 불러야 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일은 벌어지고 있고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하는 와중에 한참을 나를 살피던 투르칸이 입을 열며 내 가짜 금발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불길하고 불쾌한 느낌이 내 피부를 타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법에 어긋나기도 하고 문제 삼는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나는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스르르르르륵’

“?!”

‘탓, 탓, 타앗’

묘한 역광 덕분에 투르칸에 가까운 내 주위는 매우 어두웠다. 그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아주 살짝 고개를 움직이고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쾌한 느낌은 조금씩 강해졌고 이제 불쾌감을 너무 정말 맨살에 소름이 돋는 정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내 시야의 끝자락에서 무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발견한 나는 화들짝 놀라며 변장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날렵한 동작으로 뒤로 도약하며 투르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마족의 증표, 선명한 붉은색 아지랑이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아지랑이의 중심에 선 투르칸은 마족이란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운 거친 움직임 덕분에 몸에 착 붙는 타이트한 드레스가 부분부분 뜯어져 옷 속이 드러나긴 했지만, 어차피 맨몸도 아닌 이상 창피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붉은 아지랑이를 피해 거리를 벌린 뒤 고개를 들어 투르칸을 바라본 나는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투르칸의 주변에는 선명해 보이는 붉은 아지랑이가 투르칸의 주변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쾅!’

“젠장, 글렀군. 이건 계획에 없었소. 이제 뭘 하면 되겠소.”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겠습니다.”

“잘 따라오시오.”

“침입자다! 침입자를 잡아라!”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을 투르칸도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조금 전까지 온화하고 중후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날이 선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나는 그런 투르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투르칸이 마족임을 확인한 이상 내 머릿속에는 나는 지금 이곳을 어떻게 탈출할 것이며, 저 마족을 잡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지금 내게 무기는 없다. 바탈린들의 변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성 내에 그것도 투르칸을 만나는 자리에까지 무기를 숨기고 들어올 수는 없다.

그리고 일반적인 왕들이랑 다르게 브람스의 역대 투르칸들은 타고난 혈통과 재능으로 대부분 실력이 빼어난 무인들이라는 이야기가 있기에 내 실력으로 어설프게 덤볐다간 오히려 내가 당할 확률도 있었다.

그렇게 투르칸의 고함이 이어지는 동안 우선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내가 들어왔던 커다란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온 것은 당연 바탈린이었다. 여태껏 들어선 적 없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들어선 그는 상황을 살폈고 순식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을 끝낸 것 같았다.

물론, 투르칸이 마족인지 모르는 그가 보기에는 내가 투르칸의 변태적 취향을 거부한 것으로 보였을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이고 상황 파악을 끝낸 바탈린은 자기가 어떻게 도우면 되는지 물어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나와 바탈린은 마치 결혼식에서 도망치는 신랑과 신부 같은 모양새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르칸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비병들이 우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허억.”

“체력을 좀 키우는 게 좋겠군.”

“허억. 제가 체력이 나쁜 편은 아닙니다. 다 이 가슴 보형물을 포함한 몸에 덕지덕지 붙인 보형물이랑, 허억. 불편한 드레스 때문입니다.”

 “나는 훨씬 더 많은 보형물을 달고도 훨씬 오래 달린 적이 많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불편해도 조금 참아라. 이제 곧 안가에 도착하니 거기서 보형물을 제거하고 환복 할 수 있을 거다.”

성 내에서 단 한명도 마주하지 못했던 근위대였지만 성을 탈출하려 하니 그렇게 수가 많을 수가 없었다. 바탈린 없이 나 혼자 도주하려 했다면 정말 몇걸음 떼지 못하고 붙잡혔을 것이다.

성 내에 정말 많은 수의 근위대가 몰려나왔지만 바탈린은 이리저리 그들을 잘 피해 다녔다. 거기다 바탈린의 무력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몸에 붙인 여러 보형물과 불편한 복장 덕분에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데다 무기도 없는 나는 지금 전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탈린은 무기 사용이 제한되는 첩자 출신답게 격투술에 능했고 능숙하게 근위대를 제압하며 탈출로를 열었다.

간신히 성에서 탈출한 나와 바탈린은 재빠르게 도시의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 사크리파 외곽을 향해 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밖 열대우림으로 접어들었다.

열대 우림에 들어와서도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렸다. 나뭇가지에 걸친 드레스가 찢어지고 상하며 움직임을 더욱 방해했지만, 복장을 점검할 시간도 없었다.

애초에 사크리파의 성을, 투르칸의 방을 침입한 침입자를 손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열대 우림에 들어섰어도 추격대의 추격은 멈출 줄 몰랐고 쉬지 않고 달린 결과 간신히 숨돌릴 정도의 여유를 벌 수 있던 것이다.

지금 여장하기 위해 부착된 보형물들이 겉보기에도 민망하고 움직임도 방해했지만 당장은 이것을 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고 높은 수준의 변장이다 보니 특수한 접착제를 사용해 피부와 완전히 밀착시켜 놓아 접착 성분을 녹일 특수한 약품이 없다면 제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나와 바탈린은 계속해서 신부를 빼돌린 남자와 도망친 신부 같은 꼴을 하고 바탈린들이 만들어 놓은 안가로 향했다.

“저기가 우리의 안가다.”

그렇게 얼마나 더 이동했을까, 투르칸이 다스리는 사크리파는 족히 타르킨토의 두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었다.

땅이 넓은 만큼 당연히 넓디넓은 열대우림을 지니고 있었고 한밤중에 벌어진 탈출은 여명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는 와중에도 지속 되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수풀 사이에 살며시 드러나 있는 오두막이 보이며 우리의 탈출은 일차적으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성의 출입부터 탈주까지, 그리고 지금의 안가까지 오랜 기간 방치되었지만 바탈린들은 사크리파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이룬 듯 보였다.

알고 본다면 보이겠지만 수풀에 교묘하게 숨겨진 오두막은 근처까지 다가가지 않고서야 찾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끼이이익’

‘슈슉’

“?!, 피해라.”

‘휘릭, 탓’

‘턱’

안가의 입구에 선 바탈린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안가의 보안장치와 함정들을 해제한 후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오두막에 들어서려는 순간 오두막 안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어두운 곳에서 무언가 날아들었지만 바탈린은 나에게 경고함과 동시에 능숙하게 피해내었다. 바탈린의 경고성과 함께 자세를 낮춘 나는 오두막 안에서 날아온 물체를 보았다.

오두막 안에서 날아든 물체는 볼트였다. 내가 사용하는 마도 공학 총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조금 더 짧은 한 뼘 정도 되는 길이를 가진 사거리나 위력보다는 발사체의 속도만을 높인 듯한 모양이었다.

아마 모양으로 보아 그 용도를 생각해 보았을 때 볼트의 끝에는 효과를 알 수 없는 독이 발려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이런 무기를 쓰는 이들은 보통 암살자 혹은 첩자들이었다.

“그냥 순순히 볼트에 맞았다면 적어도 편안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너 또한 바탈린이다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없다. 그저 명령을 수행할 뿐.”

“내가 바탈린이다. 누구의 명령인가.”

“잊었나 보군 바탈린은 단 한 사람의 명령만 듣는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한 나와 바탈린 둘 모두 오두막을 향해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두막 안에서 조심스레 한 인영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손에는 쇠뇌를, 다른 한손에는 시미터를 든 그는 나도 아는 알굴이었다. 사크리파에 도착해 우리를 통에서 꺼내어준 선원이었다.

선원은 장전된 짧은 쇠뇌를 우리에게 겨눈 채 말을 이었다. 바탈린, 아니 거한은 선원의 습격에 매우 당황한 듯 보였다.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적진 한복판에서 방치된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림버스 카라반의 바탈린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만큼 서로 간의 유대와 결속, 신뢰가 깊은 관계라는 것이다. 비록 사크리파에 발이 묶인 다른 바탈린과는 달리 선원의 신분인 그가 외부를 오갈 수 있다고 해도 바탈린의 변심은 거한에게 꽤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 했다.

거한은 몇번에 걸쳐 선원에게 공격하는 이유를 물었고, 선원은 명령에 따를 뿐이라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한 이는 바탈린이 아닌 나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리만 브루칸, 아마 선원에게 우리의 제거를 지시한 자는 리만 브루칸일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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