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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235화 "전투 그리고 도주"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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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형 때문이구나 모래 위에선 강하게 발을 디딜 수 없으니까. 맞나요?”

“맞습니다.”

그때 빅토르가 설명하기를 대륙의 검과 다르게 남부에서 시미터가 발달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사용하는 환경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 했었다.

남부는 대부분이 사해로 둘러싸여 있고 사해뿐 아니라 브람스 인들이 사는 사도나 오아시스 지형 또한 사해처럼 유사가 아니다 뿐이지 대부분 모래밭으로 대륙의 다른 지역과 같은 단단한 지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륙의 다른 검술은 여러 번 말했듯 보법을 밟으며 중심을 굳건히 한 상태에서 일격에 힘을 실어 펼치다 보니 보법과 검법이 균형적으로 발전되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브람스는 지리적으로 단단히 발을 디딜 지반이 아니다 보니 브람스의 무예는 당연히 다른 지역과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고 자연스레 보법의 비중이 낮아진 것이다.

물론, 보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류가 적기도 하고 검술과 연계된 것이 아닌 잠시 동안 사해 위를 달리거나,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등의 특수한 목적의 보법만 남아 있는 편이다.

“대륙의 양손 검술은 디딤발을 디뎌 얻은 단단한 지지력을 바탕으로 점과 선을 통해 순간적인 위력을 내지만 지반이 무른 브람스의 검술은 디딤발을 통한 지지력 대신 몸 중심, 명치 쪽으로 힘을 끌어들여 순간적인 강함보다는 느리지만 부드러운 곡선을 바탕으로 회전력을 키워 위력을 키우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지된 시간을 활용하여 나는 빅토르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솔직히 지금 나의 검술은 완전한 브람스의 검술도 아니고 대륙식 양손 검술도 아닌 이리저리 뒤섞인 검술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브람스의 검술을 배운 게 오래되지 않았고 그전까지 기본기에 대한 대부분을 알프와 제로스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언뜻 본다면 양쪽의 강점을 모두 활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이도 저도 아닌 엉터리라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빅토르는 분명 내게 브람스의 검술은 느리지만 몸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곡선 혹은 회전이 중점이고, 그리고 그것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란탈로식 검술이라 했다.

거기다 더해 거한의 조언(?)은 남부 사막의 주 무기인 시미터가 여인들 또한 사용하기 용이하게 고려되어 만들어진 형태라 했다.

나는 내가 아는 브람스의 검술, 란탈로식 검술을 가장 잘 아는 이 두사람의 말을 바탕으로 지금의 나와 문제점을 대조해 보았다.

지금의 나는 가슴의 보형물 때문에 검술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검을 휘두를 때 마다 보형물이 팔의 움직임을 제한해 란탈로식 검술의 중점인 완벽한 원을 완성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한의 말대로라면 내가 남부식 검술을 제대로 펼치고 있다면 가슴의 보형물 때문에 검술을 구사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지금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빅토르의 말을 되새겨보자면 브람스의 검술에서 검을 휘두를 때는 순간적인 강함이나 빠르기보다는 느리지만 부드럽고 몸의 중심으로 이끌리는 곡선을 추구해야 한다 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왜 내가 제대로 검술을 펼치지 못하는 지와 내가 가진 문제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군. 아마 이제 더 이상 돕기는 힘들 거다.”

“괜찮습니다. 이제 밀리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살아나가려면 그래야 할 거다.”

‘탓’

생각이 트임과 동시에 찰나였지만 멈춰있던 나만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대치 중인 바탈린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내 옆에서 바탈린들을 견제하던 거한은 변한 나의 분위기를 바로 느낀 듯 했다.

거한은 더 이상의 도움은 어려울 거라 말한 뒤 원래 자신이 상대하던, 어느덧 일곱만 남은 바탈린들을 이끌고 다시 전장을 옮겨갔다.

“바탈린도 너를 버렸나 보군.”

“...”

‘척’

‘부우웅’

거한이 자신의 전장으로 돌아간 뒤 나의 전장엔 다섯 바탈린과 나만이 남아 있었다. 아까 거한의 공격을 맞아 쓰러졌던 바탈린 한명도 완벽히 회복하진 못했지만, 다시 일어서 쇠뇌를 내게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등 뒤에 나무를 둔, 다시금 혼자 남아있는 나를 향해 비웃기라도 하듯 한마디 말과 함께 일제히 쇠뇌를 들어 올렸다.

나는 그들의 말에 전혀 대꾸하지 않은 채 호흡을 고른 뒤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느리지만 천천히, 부드럽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부우웅, 부우웅, 부웅’

‘슈슈슈슈슈슉’

‘팅, 팅!, 팅, 팅, 팅!’

‘창!, 부우웅, 창!, 부웅, 차차차창!’

‘부웅, 스걱’

“!!”

다시 휘둘러지기 시작한 나의 검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조금 전 보다 확실히 검은 느렸지만 부드럽게 움직이며 보형물에 전혀 방해받지 않은 채 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내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바탈린들의 쇠뇌에서도 볼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볼트의 속도는 빨랐지만 펼쳐지기 시작한 내 검에 볼트들은 전부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처음 휘두른 초수는 느렸지만, 그 한 번의 휘두름을 바탕으로 원이 그려지기 시작하며 어느새 내 검은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좀 전과 다르게 뒤로 밀리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내가 볼트들을 쳐내기 시작하자 결국 볼트를 쏘아내던 바탈린들도 다시 무기들을 꺼내 쥐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명의 바탈린이 각기 다른 세 방향에서 나를 향했지만 이미 란탈로식 검술을 펼치기 시작한 내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검을 쳐내며 오히려 세 명을 압박했고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볼트까지 쳐내었다. 그리고 다시금 세 명이 합심해서 내게 돌격하는 그때 단검을 쥐고 돌격하던 바탈린 한명의 목을 베어버렸다.

다섯 중 단 한명이 죽었을 뿐이지만,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남은 네명의 바탈린들의 표정에는 동요와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다.

조금 전, 거한의 조언으로 나는 내가 가진 문제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내가 란탈로식 검술을 대륙식 양손 검술처럼 펼쳤기 때문이다.

말했듯 나는 여태껏 각기 다른 두 검술을 배우며 장점만을 결합해 익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두 검술의 융합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 검술은 단순히 검술의 종류가 다를 뿐 아니라 극명하게 반대의 입장에 위치한 검술이다 보니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검술을 펼치고 있던 것이다.

여태까지의 나는 곡선보다는 디딤발을 기반으로 빠르고 강하게 휘둘러 원을 그리며 란탈로식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검을 빠르고 강하게 휘두르는 만큼 당연히 부드러운 원이 그려질 리가 없었고 그렇다 보니 힘의 손실도, 제어도 쉽지 않았고 동작이 자연스럽게 커지며 동작들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조바심 내지 않고 검을 살짝 느슨하게 쥐었다. 그리고 여태까지와 다르게 답답할 정도로 느긋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직선이 많은 남성의 몸은 강하지만 유연함이 부족하고 부드럽고 곡선이 많은 여성의 몸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유연하다.

그리고 브람스의 검술의 기본처럼 디딤발 대신 몸의 중심을 기준으로 삼고 회전력으로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초수가 빠르고 강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인체의 중심을 기준으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휘둘러지기 시작한 검은 느리지만 효율적으로 움직였고, 그 안에서 힘을 싣고 유지하며 위력을 키운다. 그것이 바로 브람스 검술의 핵심이었다.

‘부우웅, 창!, 부우우웅, 창!, 부웅, 창!’

‘부웅, 서걱!’

‘부웅, 창!, 부우웅, 창!, 부웅, 창!, 부우우웅, 창!’

‘부우우웅, 서걱, 스걱’

시미터를 손에 쥔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펼쳐지기 시작한 내 검의 변화는 단순히 불편한 보형물을 단채 검술을 펼친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브람스 검술의 핵심을 이해하고 펼쳐진 내 검은 이전에 힘과 속도만으로 억지로 펼칠 때 보다 훨씬 매끄럽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일전에 배웠지만 이해하지 못해 전혀 사용하지 못했던 흘리기가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이해가 되며 부족하긴 하지만 흘리기 마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바탈린들은 한명이 죽자 쇠뇌를 모두 집어넣고는 근접 무기를 들고 동시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와 실력 차이를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네 명의 바탈린은 보다 촘촘하게 연계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한명이 파고들면 다른 한명이 퇴로를 막고, 다른 두 명이 사각을 노렸다.

하지만, 그런 모든 시도는 지금의 나에게 먹히지 않았다. 실력 차이도 실력 차이지만 애초에 이들의 주력은 습격이나 암습이지 지금과 같은 전면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네 명의 바탈린 모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며 비명조차 없는 깔끔한 죽음을 맞았다.

“도움 고마웠습니다.”

“헛된 수고는 아니었군.”

“바탈린들의 이탈이 확인된 이상 이 안가는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몸을 피할 다른 곳이 있습니까?”

“안가는 더 있지만, 바탈린들이 돌아선 이상 그곳 또한 안전하지 않다.”

그렇게 내가 전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명의 바탈린들을 상대했던 거한 또한 전투를 마치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가 상대한 바탈린의 숫자도 많고 맨손 격투술로만 상대한 만큼 나보다 시간은 걸리긴 했지만 처음 공언한 대로 돌아선 바탈린들에게 깔끔한 죽음을 안겨준 듯 보였다.

전투는 끝났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우리를 향한 추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동료들의 안전도 확인하고 서둘러 합류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점이 필요한데 그의 말처럼 바탈린들이 돌아선 이상 이들이 원래 사용하던 안가는 모두 사용하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잠시라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거다. 내 도시로 숨어들어 보형물을 제거할 약품과 상황을 좀 파악하고 오겠다.”

“알겠습니다. 저는 일단 이곳을 좀 정리하겠습니다.”

“...부탁한다.”

생각을 골똘히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거한은 자신이 아지트로 돌아가 약품을 챙기고 상황을 파악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말을 아끼며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이곳에 남아 정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나지막이 부탁한다고 하는 그의 말에서 거한이 이들에 대해 가졌던 애착과 그 상실감이 느껴지는 듯 보였다.

‘털썩’

“?”

“젠장, 몸이 불덩이네.”

그렇게 부탁한단 말과 함께 몸을 돌린 거한은 우리가 헤쳐왔던 열대 우림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던 거한이 휘청휘청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린 것이다. 황당한 상황에 달려가 거한의 몸을 건드린 나는 다시금 욕지기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거한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들이 가득했고, 몸은 매우 뜨거웠다. 사막의 날씨와 조금 전까지 거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감안해도 비정상적인 온도였다.

거한이 쓰러진 이유는 아마 독 때문일 것이다. 바탈린들은 적진에서 활동하는 첩자인 만큼 습격과 암습이 주력이었고 그런 이들이 무기에 독을 바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서둘러 바탈린들의 품을 뒤져 보았지만, 해독제가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이들은 이번 전투에 우리를 반드시 죽이고 자신들이 패배할 것이란 전제가 없었던 것이다.

“저쪽이다! 저쪽에서 소음이 들렸다!”

해독제가 없음을 확인한 나는 다시 거한에게로 향했다. 다시금 상태를 살핀 결과 체온은 올랐지만 비교적 숨소리는 고른 것을 보아 극독은 아닌 듯 했다.

그렇게 의식이 없는 거한을 보며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설상가상 문제는 또 터졌다. 어느새 전투 소리를 들은 추격대가 따라붙은 것이다.

육성이 들릴 만큼 추격대가 따라붙은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바탈린들의 시체를 대충 안가에 밀어 넣고 거한을 업은 뒤 자리를 벗어났다.

“하아... 더럽게 무겁네...”

“흔적이 저쪽으로 나 있다!!”

추격대의 추격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리고 지금 나는 길잡이도 없이, 이 무거운 근육 덩어리를 등에 업은 채 열대우림을 그저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추격대가 이미 우리를 거의 다 따라잡았기에 흔적을 지우고 이동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 거한이 덩치만큼이나 더럽게 무겁다는 것이다.

알프와 제로스의 지옥의 단련이나, 황금용이 내게 준 선물이 아니라면 아마 진즉에 따라잡혔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뭐 효과는 모르겠지만 세계를 넘은 자라는 이름이 주는 이름값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적응 안 되는 뜨거운 날씨에다 몸에 치렁치렁 달린 보형물 하며, 거한까지 등에 업은 채 열대 우림을 나아가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너무 힘든 만큼 이런 잡생각이라도 해서 힘들다는 생각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결승선 없는 이 도주극을 버티지 못할 것 같기에 억지로라도 잡생각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걸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고 그렇게 이동하는 와중에도 점점 우리와 추격대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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