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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234화 "불편한 전투"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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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문이었다. 왜? 리만 브루칸이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리만 브루칸은 드리쿨 병에 걸리며 마족의 존재를 의심했고 제국에 부탁해 우리를 끌어들였다.

리만 브루칸이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 그리고 다른 대 부족장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우리를 방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한과 선원을 주시하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것이군, 우린 버려진 것인가.”

“우리가 아니라 너뿐이다.”

‘스윽’

“?!”

“...”

결국 거한은 상황을 받아들였다. 림버스 카라반, 그리고 사크리파의 바탈린은 제대로 쓰이기도 전에 버려진 것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현실이 거한을 괴롭혔다. 버려진 것은 너뿐이란 말과 동시에 오두막 주변 수풀에서 여러 사람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걸어 나온 숫자는 열다섯 나도 익히 아는 얼굴들도 많았다. 거한의 막사에 있던 이도, 나의 변장을 도왔던 이들도 있었다.

람비스 카라반 내에 몇 명의 바탈린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 거한을 포함한 열일곱의 바탈린이라면 아마 거의 대부분의 바탈린이 포섭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순간 나는 이들이 여기 있는 것을 보고 알프와 셀시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확인할 길은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을 믿으며 속에 남은 불안을 밀어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알프와 셀시는 바탈린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쉽게 당할 이들이 아니었다.

“이게 전부인가?”

“제국인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다.”

“처리한 것인가?”

“도주했다. 저자를 포함한 제국인들의 용모파기를 투르칸에게 넘겼으니 사크리파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잡힌다면 투르칸이 우리의 일을 대신 해주겠지.”

선원은 자신에게 가까운 곳에 있는, 나에게 목소리를 변조할때 쓴 약을 주었던 바탈린에게 왜 수가 이리 적은지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내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알프와 셀시는 무사하다. 이제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가 두 사람과 합류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람비스 카라반은 들어라, 바탈린이 가졌던 의지는 누구의 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바탈린이 잘못된 길에 들어선 이상 내 손으로 없애야겠지. 나는 바탈린을 아꼈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진 말거라.”

“말이 길군.”

‘퍽!’

“컥!”

“제국인, 불편하더라도 검을 든다면 적어도 네 한 몸은 지킬 수 있겠지. 검을 들어라.”

‘턱’

“이들을 죽여도 됩니까?”

“최소한 고통은 없도록 부탁한다.”

선원과 옆에 섰던 바탈린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숲에는 적막이 들어찼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벌레들조차 침묵했다.

그런 대치 속에 서 있던 거한은 자세를 풀고 주위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그가 람비스 카라반, 바탈린들의 대장이 그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통해 그가 바탈린에 가지고 있는 애정과 자부심 또한 알고 있었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그 좌절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거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향해 조롱하던 선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한은 갑작스레 자세를 낮추고 도약하며 선원의 복부를 가격했다.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였다.

거한의 일격은 선원의 목숨을 앗아가진 못했다. 아니, 바탈린 내부에 배신과 분열을 조장한 그를 일격에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한은 선원의 허리춤에 채워진 시미터를 끌러내어 내게 던졌다. 그리고 검을 받은 나와 거한이 다시 주변을 경계하며 자세를 취하자 숲속에서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창!, 창!, 창!, 차차창!’

‘슈슉’

‘창!’

열다섯의 바탈린들 중 내게 붙은 것은 다섯. 최근 들어 내 실력이 부쩍 상승한 것을 따지자면 그다지 어려운 숫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생각보다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보형물들 때문이었다.

여인이어도 큰 체구를 지닌 남부인들인 만큼 북부인들과 비교하면 남부인들은 풍만한 가슴과 큰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다.

엉덩이야 남자이고 몸을 단련한 만큼 나도 한 엉덩이 하기에 그저 모양만 다잡는 정도의 보형물을 붙였지만, 문제는 가슴의 보형물이었다.

이렇게 무겁고 불편한 것을 몸에 지닌 여인들이 어찌 생활할까 싶어질 정도로 가슴 보형물은 계속해서 내 움직임을 제한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성에 숨어들 때의 목적이 성 상납이었던 만큼 내가 착용했던 복장은 일반적인 여느 여인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차라리 셀시나 프란시아처럼 모험가의 복장만 되었어도 꽉 동여맨 속옷과 단단한 가죽 소재의 복장이 체형을 잡아주어 지금보다는 움직임이 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복장은 위에 걸친 속옷이 비춰 보이는 얇디얇은 드레스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제 기능을 하고 있다 보기 어려운 상태고 속옷 또한 기능성보다는 가리기 위해 실크를 덧대 놓은 것에 불과해 보형물의 움직임을 전혀 잡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부웅, 창!’

‘창!, 차차창!, 창!’

‘슈슉’

물론 내 실력이 최근 들어 부쩍 상승한 영향도 있겠지만 솔직히 나에게 달려든 다섯 바탈린들의 수준은 솔직히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유대가 깊은 만큼 바탈린들의 연계력은 좋았지만 애초에 전투가 아닌 첩보 활동이 주목적인 이들이기에 개개인의 무력은 대단치 않은 듯 싶었다.

앞서 말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신 방어하기도 버거울 만큼 밀리는 중이었다. 보형물들 때문에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했다 불편하지만, 자세를 잡고 란탈로식 검술을 펼치려 몸을 조금 움직이자 출렁이는 가슴의 보형물이 팔의 움직임을 막아 원을 그려 힘을 모으는 데 결국 실패해 버렸다.

거기다 더불어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 또한 골치였다. 정상적인 검을 든 이가 드물었고 클로나 단검 등 길이가 짧은 무기로 근접해 붙다 보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보통 전투에서는 무기의 길이가 긴 것이 유리한 것이 맞다. 하지만, 수가 많고 동작이 날랜 이들이라면 길이가 긴 것보다 짧은 무기가 더 성가시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욱 나를 골치가 아프게 하는 것은 이들의 무기가 근접 무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처음 선원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짧은 손 쇠뇌를 사용해 볼트를 날려대니 그것 또한 문제였다.

‘창!, 차차창!, 창!, 창!’

‘턱’

“젠장, 이 보형물만 없었어도.”

“이제 그만 죽어라.”

‘슈슈슈슈슈슉, 텅!, 텅!, 텅!, 텅!’

방어에 급급하긴 했어도 뒤가 막히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려 애써 보았지만 연속된 공격에 뒷걸음질 치던 나는 결국 커다란 나무에 등이 닿아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가슴의 보형물을 원망하며 욕지기를 내뱉었지만 그런다 해서 나아질 것은 없었다.

내가 벽에 몰리자 바탈린들은 전부 근접 무기들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쇠뇌를 들어 올리고 일제히 벽에 몰린 나를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볼트의 크기를 줄인 만큼 날아드는 볼트의 속도는 빨랐지만 피하고 막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알프와 제로스의 훈련 덕분도 있지만 애초에 날아드는 볼트의 속도가 작은 손 쇠뇌 치고 빠르다는 것이지 저 무기가 전면전 용이 아닌 기습용인 만큼 나에게 날아드는 걸 알고서 못 막아낼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자칫 실수해서 어떠한 독이 발려있을지 모를 볼트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죽을 가능성도 높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짧은 손 쇠뇌인 만큼 빠른 장전 속도를 가졌기에 다섯명의 바탈린들은 궁지에 몰린 나를 향해 끊임없이 볼트를 쏘아대었다.

‘슈슈슈슈슉’

‘텅, 텅!, 텅, 터더덩!’

‘탓!’

‘퍽!, 퍼벅!’

“끅!”

움직임이 불편하기도 했고, 이미 잔뜩 지쳐있기도 했기에 서서히 집중력이 떨어지며 쏟아지는 볼트를 막아내는 데도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저들이 볼트를 모두 소진하기 전에 당하겠다 싶은 찰나 갑작스레 볼트를 쏘아대던 바탈린 한명의 허리가 꺾이며 볼트 세례가 멈추었다.

“뭘 하고 있지? 이것도 처리하지 못하나?”

“보형물 때문에...”

“보형물을 탓하지 마라, 애당초 시미터는 브람스의 여인들도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진 검이니까.”

“?!”

쏟아지던 볼트 세례를 멈춘 거한은 내게 붙어 숨을 고르며 날 바라보며 질책하듯 따져 물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이미 거한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다.

거기다 저 뒤에서 그가 상대하던 바탈린들이 달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쉽지 않은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당연한 것이 거한의 손에는 여전히 무기는 쥐어져 있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격투술에 조예가 깊다고 하나 격투술만으로 무기를 든 다수의 사람을 상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도와줘서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 좋을 리 없던 나는 당연히 보형물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함을 말했지만, 본전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또 한 번 그의 꾸중을 들으며 빅토르에게도 듣지 못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미터란 무기 자체가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사용하기 편하게 설계된 무기라는 것이었다.

사실 대륙의 대부분의 검은 여성보다는 남성 친화적으로 설계된 것이 맞다. 우선 어지간한 여성의 근력으로는 휘두르기 힘든 무게가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로는 검날과 힐트의 길이다. 대륙에서 양산되는 대부분의 검은 검날이 두껍고 길며, 폼멜 또한 길게 설계되어있다. 이것은 평균적인 남성의 체격에 맞춰 제작된 것이다.

물론 여성들이 검을 드는 일 자체가 드물긴 하지만 남자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덩치로 인해 무거운 무게를 제하더라도 여성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한 구조는 아니다.

검을 휘두름에 있어 쥐는 자세는 검의 가드 끝자락과 폼멜 바로 위를 잡아 검이 흔들리지 않게 지지해야 하는데 일반적인 검을 여성이 그렇게 쥔다면 생각보다 긴 힐트의 길이 때문에 오히려 불편한 자세가 되어버린다.

거기다 보다 유리한 전투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긴 길이 덕분에 평균적인 체형을 가진 여성이 검을 들고 하단세를 취하면 검 끝이 바닥에 닿게 된다.

뭐 그밖에 다양한 문제로 인해 무기를 드는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체형에 맞게 무기를 맞춤 제작해야 했고 그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 한마디로 여인들이 검을 쥠에 있어 진입 장벽 자체가 높다는 이야기다.

거한의 말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검의 목적 자체가 남녀 모두 사용하기 용이하게 제작되었다면 그걸 사용한 검술 또한 여장한 내가 펼쳐도 이질감이 없어야 한다.

물론, 체형이 익숙치 않기에 불편하기도 할 테고 숙련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아예 동작을 방해해 구사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단 이야기다.

지금까지는 나는 그저 내가 여장하여 움직임이 불편해 검술을 펼치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거한의 말 대로라면 지금 내가 검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문제는 내게 있단 말이 된다.

거한이 벌어준 잠깐의 시간 동안 다시금 내 머리는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왜 나는 란탈로식 검술을 펼치지 못하는 걸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러한 집중은 순간이지만 세상을 멈추었고 과거 빅토르에게 훈련받을 때 그가 했던 말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양손 검술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란탈로식 검술의 핵심은 원입니다. 란탈로식 검술이 아니어도 시미터를 활용한 검술은 곡선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베기에 특화된 무기라 그런 것 아닌가요?”

“50점짜리 대답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나요?”

“베기에 특화된 무기인 시미터가 생겨난 배경에는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내기 위해서도 있습니다.”

“남부 사막의 브람스 하면 큰 덩치와 힘인데 작은 힘이라니요?”

“브람스의 지형은 어떻습니까?”

“가보진 않았지만 드넓게 펼쳐진 황금빛 모래, 그 위를 누비는 함선이 있다 들었어요.”

“맞습니다. 브람스와 모래, 함선은 빼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면 왜 브람스에서 베기에 특화된 무기를 만들었는지도 아시겠습니까?”

어린 시절 부터 빅토르는 외지인인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카라반을 이끄는 할아버지에게서 검술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배워왔다.

비록 빅토르가 브람스를 떠나 다리온을 만나 제국에 정착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이미 기본적인 이론과 원리들은 대부분 빅토르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빅토르는 자신은 란탈로식 검술의 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어도 검술 자체를 끌어올릴 순 없다고 말하며 란탈로식 검술의 형과 이론에 대해 자주 설명해 주었었다.

그리고 그 내용 중에 분명 시미터를 사용한 검술의 유래에 대해 말해준 기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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