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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246화 "수그라 브루칸"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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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하지 못했던 움직임의 정체는 바로 바탈린이었다. 수그라의 이야기를 들은 바탈린 또한 수그라의 제안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는 자신과 타리브의 일로 수그라의 명예가 사라지고 그녀가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가 도망자 신세가 되느니 외할아버지의 모든 것이 사라진대도 이 모든 상황을 막지 못한 자신이 책임지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생각이 끝나자 바탈린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몸은 아까 쓰러진 루이마의 죽음을 확인할 때 그의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런 만큼 다른 준비는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저택의 병사들에게 자신이 루이마를 죽인 듯한 상황만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거칠게 루이마의 방문을 차고 나선 바탈린은 온갖 소란을 끌며 저택을 누볐다 최대한 많은 병사들이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낸 뒤 그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루이마 브루칸의 죽음은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바탈린과 접촉했었단 이유로 그의 배후로 우리를 지목하진 않았으면 하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들을 믿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여러분들이 원하는 바를 이뤄낸다면 브람스의 다른 부족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군요.”

“큼큼,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소. 우리 또한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소. 적어도 지금 수준의 보급을 약속한다면 병력은 해산하고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가겠소.”

“알겠습니다. 이번 일로 람비스 카라반은 사라졌지만 파티흐 무라시드의 유지는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알겠소.”

소란을 부리고 도망친 바탈린은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많은 목격자들은 루이마 브루칸 살해의 범인으로 바탈린을 지목했다.

결국 람비스 카라반의 명예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더 이상 평화를 거래하는 람비스 카라반은 브람스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뒤, 병력을 모았던 군소 부족들의 부족장과 대면한 타리브는 그들과 재협상을 하였다. 협상은 타리브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그들은 불리한 조건임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바탈린이 이끌었던 람비스 카라반과 이들이 접촉했던 것은 분명했기에 명분과 실리 모두 타리브에게 있었다.

“바탈린은...? 찾았어?”

“아니, 아직...”

“...협상은 잘 마무리되었어.”

“오빠라면 잘 할 거라 믿었어.”

“수그라, 동생아...”

“안돼. 지브리터는 오빠가 이어야 해.”

“아니, 지브리터의 브루칸은 네게 더 어울려.”

“바탈린도 떠났는데 오빠마저 떠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몰라 오빠 마음대로 해!”

‘쾅!’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타리브는 자신의 여동생 수그라를 찾았다. 지브리터에 있는 대부분의 병사들을 풀어 바탈린을 찾고 있지만 아직 그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뒤이어 협상에 대한 내용을 수그라에게 모두 전한 타리브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여동생 수그라를 불렀다. 그리고 수그라는 오빠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설득이 이어졌지만 수그라의 노력에도 오빠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화를 내며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수그라가 몰랐던 것이 있다. 타리브는 단순히 아버지를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긴 했어도 그때 당시에는 그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물론, 셋 중 가장 머리가 좋았고 뛰어난 수그라와 논의했다면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 몰랐지만, 그때 이미 상황은 악화하였고 조금 더 늦는다면 아버지의 죽음으로도 전쟁은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타리브의 어깨를 짓누르는 감정은 바로, 수그라가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다 했을 때 마지못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을 때 자신이 느꼈던 안도감이었다. 일은 벌여놓고 책임은 회피하고 싶었던 자신의 속마음에 대한 혐오였다.

“여기 있을 줄 알았다 바탈린.”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타리브.”

“너야말로, 수그라가 많이 슬퍼하고 있어.”

“...”

“애초에 수그라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었나...”

“나는 네 신념과 결정을 존중한다. 너로 인해 덧없이 흐를 수많은 피를 막을 수 있었다.”

“과분한 칭찬이다. 책임지지 못 할 일이었지. 결국엔 너와 수그라가 모든 것을 해낸 거야.”

“이제 어쩔 생각이냐.”

“람비스의 명예를 되찾아야지. 내 손으로 부순 것이니까.”

“나도 돕겠다...”

“당연한 이야기를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 람비스 카라반의 무라시드는 바탈린 너다.”

그렇게 수그라를 뒤로하고 저택을 빠져나온 타리브는 지브리터 북쪽의 한 해안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박한 배 한척과 한 사람이 배 앞에서 작게 모닥불을 피운 채 앉아있었다.

그곳에 있던 것은 바탈린이었다. 애초에 타리브는 바탈린이 어디 있을지 알고 있었다. 다만, 바탈린이 있는곳을 수그라가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을 벌일지 알기에 말하지 않았다.

타리브를 바라본 바탈린은 그에게 돌아가라 했지만 이미 그가 어떤 결심을 한 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람비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사해 위로 배를 띄웠다.

“그 뒤로 수그라 브루칸님은 처음 보는 겁니까?”

“아니다, 나와 타리브가 떠나고 얼마 뒤 루이마 브루칸의 죽음을 완전히 수습한 수그라가 나를 찾아왔었다. 과거를 지우고 함께 하자고, 그날 배에 오르기 전 자신과 했던 약속을 지키라 했다.”

“거절... 했습니까?”

“맞다. 그때 리만 브루칸이 브람스의 평화를 위해 리라프 투르칸의 독주를 감시해야 한다며 제안해왔었다. 나는 수그라의 제안도, 타리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리만 브루칸의 제안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세 사람의 관계는 파악이 끝났다. 이야기를 마친 바탈린은 오랜만에 떠올린 옛 기억을 되새기며 지그시 눈을 감았고 나 또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똑똑똑’

“브루칸님과 만나기 전 준비를 돕겠습니다.”

“...”

그렇게 서로 다른 이유였지만 나와 바탈린 두 사람 모두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한 채 아침이 밝았고 노크 소리와 함께 관리인과 여러 하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연히 목욕이었다. 앞서 말했듯 브람스엔 남탕, 여탕 구분이 없기에 한곳으로 같이 끌려간 나와 바탈린은 순식간에 헐벗겨져 씻기기 시작했다.

확실히 여러 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는지 여러 향초를 섞은 물에 몸을 담그고 씻기를 반복하면서 땟물이 줄줄 나왔다.

그리고 한가지, 나는 알몸이 아닌 신체의 대부분이 보형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도 모르게 적응이 되었는지 수 많은 사람 앞에서 헐벗겨 지니 괜스레 창피함과 수치감이 느껴졌단 사실이다.

어쨌든 그렇게 여러 하녀들의 도움으로 나와 바탈린의 단장은 순식간에 끝났고, 브람스 전통 복장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수그라 브루칸을 만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비지스 타르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으니 모두 자리를 물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브루칸의 방은 넓긴 했지만, 꽤 단출했다. 애초에 사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다고 소문난 브루칸인 만큼 귀금속 장식품은 별로 없었다.

브루칸의 방에는 장식품 보다는 철의 지브리터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여러 무구와 철로 만든 금형 장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쳐져 있는 실크 너머로 브루칸이 앉아있는 실루엣이 살짝 보일 뿐이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 수그라 브루칸은 그녀를 지키는 근위대를 포함한 관리인 비지스 타르만 까지, 주위를 모두 물렸다.

당연히 비지스 타르만이 걱정했지만, 재차 강조하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하녀를 포함한 모두가 방을 빠져나갔고, 방에는 수그라 브루칸과 바탈린 그리고 나만이 남아있었다.

“오랜만이네 바탈린.”

“수그라...”

“보고싶었어.”

“...”

“그래도 이렇게 죽기 전에 봐서 다행이다.”

“?? 그게 무슨...?”

“한편으론 안심이야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반려를 맞은 것 같아. 좋아 보여.”

“아니 이자는...”

“애써 변명하지 않아도 돼.”

“주제넘지만 오해하신 부분이 있는 듯 합니다.”

“?!!!”

주변이 조용해지자 수그라는 조금 전 위엄 넘치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어느새 한 여인의 목소리로 바탈린을 맞이했다.

그리고 타리브가 왜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죽어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의 말을 들은 바탈린은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바탈린이 찾는 대상이 수그라 브루칸이었던 것을 몰랐기에 선장의 말에 의아함을 내비쳤던 것이지 지브리터의 브루칸이 이미 드리쿨 병에 걸린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탈린의 놀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지만, 지금의 나와 바탈린의 관계를 수그라 브루칸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뒤늦게 놀람에서 정신을 차린 바탈린이 해명을 해보려 했지만 수그라 브루칸은 자신은 다 안다며 번번이 바탈린의 말문을 막아 세웠다.

분명 어제 들었던 바탈린의 이야기 속에선 똑똑하고 현명한 브루칸이었지만 바탈린의 앞에선 그녀의 목소리가 변했든 한명의 여인일 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오해도 풀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할듯싶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두 사람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발 물러서 있던 나는 조심스레 수그라 브루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오해를 풀기 위해 목소리를 내비쳤다. 과거 리라프 투르칸을 만났을 때야 임시로 목소리를 변조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누가 들어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런 내 목소리를 듣자 실루엣뿐인 실크 커튼 뒤의 수그라 브루칸이 매우 놀라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두 분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늦게 정체를 밝힌 점 죄송합니다. 저는 제국에서 온 데일 볼든 백작이라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여장을 하고 있지만 엄연한 남자입니다.”

“아, 네 그렇... 네...?”

“설명드리자면 조금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시간 관계상 용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수그라 브루칸님, 현재 드리쿨 병에 걸리신 게 맞습니까?”

“뭐...?!, 수그라 그게 사실이야?”

“아... 아니 바탈린 그게...”

‘다다다다다’

‘촤락’

“꺄악!”

나는 기세를 몰아 내 정체를 완벽하게 드러냈다. 내가 브람스인이 아닌 제국인인것을 다짜고짜 밝히는 것이 조금 꺼려졌었지만, 그녀의 협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내 앞의 대 부족장이 수그라 브루칸이 아닌 다른 부족의 대 부족장이었다면 제국인인 나를 보며 내정간섭이라며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체를 밝힌 것은 어제 바탈린이 들려준 이야기 속 수그라 브루칸이라면 파티흐의 유지를 이었기에 분명 브람스의 평화를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현명한 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내 뜻이 무색하게도 여태껏 무뚝뚝하기만 했던 바탈린이 격하게 반응했다. 바로 그녀가 드리쿨 병에 걸렸다는 내 이야기 때문이다.

중후한 나이에 걸맞게 무게감 있던 바탈린의 모습은 어디 가고 그 역시도 지브리터의 부족장에서 여인으로 변한 수그라와 같이 한낱 정인을 앞에 둔 청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그라 브루칸은 자신의 병을 숨기려 했던 듯 예기치 못하게 바탈린 앞에서 자신의 병이 밝혀지자 조금 전 내 목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욱 당황하였고 결국 바탈린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 앞에 쳐진 실크 커튼을 힘차게 뜯어 버리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다가온 바탈린으로 인해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들어오지 마!”

그녀의 비명이 바깥까지 전달 되었던 듯 바깥 또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명에 의해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비지스 타르만은 쉽사리 들어오지도, 안 들어오지도 못한채 수그라 브루칸의 안부를 물었다.

결국 문이 조금 열리며 그가 들어오려는 기미가 보이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수그라는 고개를 들어오려 비지스 타르만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바탈린의 행동을 수그라 본인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게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금 열렸던 문은 다시 닫혔고 소란스러웠던 바깥도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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