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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52화 "해주(解呪)"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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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슉, 딸그락’

하지만 뿔이 솟은 자는 이대로 우리에게 잡히면 안 된다 생각했는지, 얕은 신음과 함께 어깨에 박힌 볼트를 뽑아 바닥에 내던지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인지 나 또한 재빨리 그를 뒤쫒았지만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고, 그는 외길인 줄 알았던 통로를 따르지 않고 석실 내부를 이리저리 이동하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며 놓쳐버렸다. 아마 동굴 안에 우리가 들어온 통로 말고도 외부로 통하는 다른 길들이 있는 듯했다.

한참의 추격에도 결국 그를 놓쳐버린 나는 실망감을 느꼈다. 결국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제몬드의 바램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그에게 죽음으로 자유를 주어야겠다 생각하며 공동으로 돌아왔다. 공동으로 돌아오니 내부의 전투는 이미 끝나있었다. 결국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목과 몸통이 분리된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내가 쏜 볼트를 뒤통수에 꽂은 자들도 목과 몸통이 분리된 것을 보아 혹시나 해 알프가 다시 한번 처리 한 듯 했다. 그만큼 조금 전까지 달려들던 그들의 상태는 괴기스럽기까지 했었다. 이오나는 조금 전 급작스럽게 주문을 많이 외웠던 반동인지 힘이 풀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있었다.

"백작님, 그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동으로 돌아온 나는 말없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볼트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발견했는지 알프가 내게 다가와 뿔이 솟은 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고, 나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알프 또한 내 뜻을 이해했는지 말없이 볼트를 회수하는 나를 도왔다.

'달그락'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과 그 주변에 있는 볼트를 수거한 뒤, 조금 전 마지막에 뿔이 솟은 자에게 쏘아낸 볼트를 수거하던 내 발에 무엇인가 채였다. 동굴의 바닥과 비슷한 색의 나무로 조각된 조각품이라 눈에 띄지 않았던 듯 했다. 형태를 정확히 판단하긴 어려웠으나, 언뜻 보니 무엇인가를 움켜쥐는 듯한 손 모양의 나무 조각품이었다.

'몽글 몽글 몽글'

나는 조각품을 집어 들었다. 집어 든 조각품을 자세히 이리저리 돌려보자 조각품 안에서 갑자기 백색과 흑색의 안개가 아주 조금 피어오르더니 이내 섞이며 회색이 되다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고 있었다. 조각품을 보던 나는 불현듯 이것이 봉인의 매개체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알프, 이오나 잠깐만 이리로."

"백작님, 이게 무엇입니까?"

"아까 뿔이 솟은 자가 떨어트린 것 같아. 특별해 보이는 점은 없어?"

"특별해 보이긴 하지만 잘은 모르겠습니다."

"이오나는? 무언가 보이거나 느껴지는 게 있어?"

"외관으론 잘 모르겠지만 조각품 내부에서 강한 마나의 유동이 느껴져요."

나는 알프와 이오나를 불러 조각품을 보여주었다. 내가 본 것을 본다면 알프와 이오나도 단번에 알아볼 것이라 생각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조각품을 내밀자 알프가 이게 무엇인지 물어왔다.

나는 알프에게 아까 뿔이 솟은 자가 떨어트린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알프에게 조각품을 건네자 알프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내게 다시 건넸다.

내 눈에 선명하게 몽글거리며 보이는 이 연기가 이들 눈에 정말 안 보이나 싶어 이오나에게도 조각품을 건네며 물었고 이오나는 이리저리 만져보다 손에 꼭 쥔 채로 잠시간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눈을 뜨며 조각품 내부에서 강한 마나의 유동이 느껴진다고 얘기할 뿐이었다.

알프와 이오나의 대화로 확실해진 것은 이들은 내 눈에 보이는 안개나 연기 같은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 펼쳐진 이형의 능력들을 나만이 그 실체를 보는 것으로 보아 제몬드의 이야기처럼 나에게 나도 모르는 해주(解呪)의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특이체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제몬드는 내가 봉인의 매개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확언한 것을 보면 그는 나의 상태에 대하여 조금 더 알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대답을 해줄지는 미지수였다.

"오, 벌써 돌아왔는가 그대들."

우리는 공동의 시신들을 한쪽에 정리한 뒤, 다시 문 안으로 들어가 제몬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는 우리를 본 제몬드는 여전히 벽에 기대 앉은 채로 고개를 들며 우리를 반겼다.

"이런... 어제 그대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내가 쓴 능력 때문에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차렸었나 보군."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본 제몬드는 우리의 몸에 확연히 보이는 전투의 흔적을 보고 말했다.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를 어찌 알고 함정을 파고 기다렸나 싶었는데 제몬드의 대답으로 궁금증은 바로 해결되었다.

일전 이오나의 이야기처럼 마법이든 마술이든 발현하면 마나흔이 남는다고 했다. 아마 발현 방식은 다르더라도 마나를 사용한다는 근원이 같기에 마족의 이능 또한 비슷한 종류의 마나흔을 남겼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제몬드, 봉인의 매개체를 내가 한눈에 알아볼 거란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였소?"

"합리적인 질문이네. 백작, 그대는 내 인형을 단번에 간파하지 않았나. 나름 꽤 공들여 만든 인형이었는데도 말이네. 게다가 나를 마주하며 나에게 적대감도 내비치지 않았고 말이네."

과연 그는 어떻게 내가 봉인의 매개체를 알아볼 수 있음을 확신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한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봉인의 매개체를 보여주기 전 제몬드에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모호한 대답을 하였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소?"

"음... 자세히는 말할 수 없으나, 아니, 말할 수 없다기보다는 말하지 못한다 하는 게 맞겠군. 우선 인간은 마족에게 무조건 적으로 적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네. 자네가 특이한 경우고. 내 눈에 그대는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자네는 진리를 꿰뚫어 보는 무언가가 있어, 그래서 확신했네."

"금제... 입니까? 봉인에 의한?"

"그보다 더 상위의 개념일세."

그의 모호한 대답에 나는 다시 그에게 합리적인 질문의 근거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고, 잠시간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답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나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답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무조건 적으로 마족에게 적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역시나, 그 이유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한다 했다.

거기다 더해 내게 마나의 축복이 없음에도 자신의 인형과 마을의 마술을 간파한 것을 보아 내게 진리를 꿰뚫는 무언가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조차도 그 원인과 근원을 모르는 듯 해 보였다.

제몬드에게 혹시 봉인의 금제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물으니 제몬드는 내가 금제의 존재까지는 몰랐는지 아주 잠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봉인의 금제보다 더 상위의 개념으로 말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소, 고맙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봉인의 매개체는 찾았는가?"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난색을 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나는 그에게서 더 이상 정보를 들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제몬드 또한 내가 곤란한 질문을 그만할 기미가 보이자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곤 봉인의 매개체를 찾았는지 물어왔다. 나는 대답 대신 품에서 조각품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오, 그것이었는가 역시 그대라면 찾을 줄 알았네. 자 어서 그걸 부수게."

"혹, 해주 하는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겠소?"

"그대 또한 그것을, 나를 이용하려 드는가..."

"당신이 말한 것 처럼 내게 해주의 능력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을 뿐, 다른 의도는 없소."

내가 꺼낸 조각품을 보더니 제몬드 또한 단번에 그것이 봉인의 매개체임을 알아보았고 반색하며 이것을 어서 부수라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부수지 않고 제몬드에게 해주의 방법을 물었다. 내 질문을 들은 제몬드는 내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또한 자신을 봉인 이라는 이름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봉인을 이용해 제몬드를 이용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지금이 아니라면 해주의 능력이 내게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 내 진심을 전했다.

"흐음, 알겠네, 그대의 말을 믿도록 하지. 나 또한 그대의 능력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말일세. 그대에게 해주의 능력이 있다면 해주는 간단하네, 그저 손에 꼭 쥐고, 바라는 대로 생각하면 그만일세."

"그게 끝이오?"

"그게 다일세. 정상적인 해주법 이라면 복잡하고 어렵겠지만. 그대가 해주의 능력을 지녔다면 그저 바라는 대로 생각하면 이뤄지는 것. 그것이 해주의 능력일세."

그가 말한 해주의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본래의 해주법 이란 비슷한 수준의 공양물과 정확한 술식, 그리고 비슷한 혹은 상반되는 성질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했다. 하지만 해주법을 통한 해주가 아닌 그저 해주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다른 절차가 필요 없이 그저 해주가 되었다고 강하게 의식하면 자신이 지닌바 능력이 반응하여 해주된다 하였다.

"으음?!"

"어떻소. 변화가 있소?"

제몬드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조각품을 손에 쥔 채 눈을 감고 나름 강한 의지를 담아 '봉인이 풀렸다.'라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간 집중한 뒤 눈을 떠 제몬드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제몬드는 무언가 놀란 듯 하며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로 해주가 된 것인가 싶어 약간 들뜬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하하, 장난일세. 그대가 가진 능력은 해주의 능력은 아닌 듯 하네. 그저 자네가 특이한 것일 뿐."

내가 무언가 기대하는 투로 제몬드를 바라보자 제몬드는 웃으며 장난이라 말했다. 봉인은 풀리지 않았다. 제몬드는 여전히 엉망진창인 상태 그대로였으며 여전히 벽에 몸을 기대어 앉은 그대로였다.

"순간 봉인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소."

"하하하, 미안하네. 나 또한 그대의 상태가 궁금할 따름일세. 게다가 수천년간의 잠에서 깬 후 처음 대화를 나눈 상대가 그대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친근함에 장난을 좀 쳤네, 자 이제 어서 봉인 매개체를 부숴주게."

갑작스러운 그의 장난에 나와 일행들 모두 황당함에 잠시간 벙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내가 봉인물을 다시 품에 넣으려는 시늉을 하자 뭐가 재미났는지 한쪽 눈알도 없는 얼굴로 싱글싱글 웃던 그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나도 장난 반 진담 반 섞인 말을 건넸다.

내 말에 제몬드는 다시 웃는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사과하며 이제 어서 봉인의 매개체인 조각품을 부숴 달라 말했다.

'콰직'

어차피 그의 봉인을 부수기로 결심한 이상 더 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봉인으로 그를 계속 구속할 생각도 없거니와 언제 풀릴지 모르는 봉인을 가지고 차후 그의 분노를 감당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조각품을 바닥에 내려놓고 밟아 부쉈다. 부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분명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아 보였지만 나무로 조각품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조각품은 마치 모래처럼 부서져 버렸다.

'쑤욱 쑤욱 쑤욱, 철그렁'

부서진 조각품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던 흰색, 검은색, 회색 안개는 넘실넘실 떠오르더니 제몬드를 향해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그의 몸에 자연스레 흡수되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제몬드 쪽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가슴께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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