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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53화 "결정"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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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께에서 뽑혀 나온 것은 거대한 못이었다. 그가 방의 한쪽 구석의 어두운 곳에 있기도 했고 이미 상태가 넝마나 다름없을 정도로 처참했기에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마 처음부터 박혀있던 듯한 그 거대한 못은 그를 구속하던 봉인의 원천 이었던 듯 해 보였다.

"엄청난 마나의 유동이에요...."

그렇게 가슴께에서 거대한 못이 뽑혀 나온 뒤 그의 몸 주위로 검은색 안개가 맹렬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몬드 쪽을 바라보던 이오나는 갑작스레 겁에 질린 듯 몸을 바들 바들 떨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맹렬하게 피어나던 안개는 서서히 사그라들다 이내 다시 제몬드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모두 흡수되어 사라졌고 앉아 있던 제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방의 어두운 한쪽 구석에서 비교적 밝은 우리 쪽으로 나온 제몬드의 모습은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모습은 고귀해 보일 정도로 매우 깔끔하게 생긴 미남자의 모습이었다. 다만, 희다 못해 창백하다 표현할 만큼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짙은 흑발과 흑안, 그리고 마치 현대의 정장과 흡사해 보이는 복장만이 눈에 띄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도록 하지, 나는 몽마들의 왕 제몬드 공이라 하네. 고맙네! 그대들 덕분에 드디어 자유를 누리는군."

우리 앞에 다가와 선 그는 굉장히 절도와 정중함이 배어있는 태도로 우리에게 다시 한번 자기소개하며 감사를 전했다.

"그대, 이오나라 했던가. 겁먹지 말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그대들과 적대할 생각이 없으니."

"....네..."

감사를 표하고 자세를 고쳐 우리와 마주 선 제몬드는 우리의 면면을 살피고 싱긋 웃어주었고, 이내 이오나를 돌아보며 그녀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오나는 좀전의 거대한 마나의 유동에 대한 충격이 아직 안 가셨는지 움츠러든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답하였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나조차도 그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놀랄 정도였는데 실질적으로 마나를 다루는 그녀는 그 엄청난 마나의 유동을 몸으로 직접 체감하며 그녀에게 있어 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듯 했다.

"자, 그럼 이제 그대들과 나 사이에는 마지막 한 가지만이 남았군. 그대 내가 마을의 주문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가?"

제몬드는 자기 말에도 불구하고 기운 없이 말하는 그녀의 대답에 머쓱한 표정과 함께 뒷머리를 긁다가 다시 나를 마주하며 말을 건넸다. 그의 말처럼 이제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곳에 온 이유이자 목적. 마을에 펼쳐진 주문에 관해서다. 나는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나의 눈으로 본 마을 사람들의 상태는 분명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상태였다.

죽음으로 인해 안식을 취해야 할 그들이지만 해가 지면 그들은 멀쩡한 상태로 죽음을 잊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내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몇 가지만 묻겠소, 마을의 사람들... 살아있는 거요?"

"얼마든지, 그들이 살아 숨을 쉬는 건지 묻는다면 아닐세, 아마도 그대는 보았겠지만, 그들은 죽은 게 맞네."

"그럼 그들은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오? 아니, 그들은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오?"

마을의 주문을 그냥 풀어 버리기엔 아무래도 꺼림직한 부분들이 있었다. 분명 낮에는 심각하게 부패한 사체였지만 밤에는 멀쩡한 상태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동하는 그들은 과연 되살아 난 것인가 아닌가 싶었고, 제몬드의 능력으로 한시적으로라도 죽음을 거부하며 되살아난 것이라면 과연 주문을 푸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쉽지 않은 결정을 앞두고 제몬드에게 물었다. 과연 그들이 진정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제몬드는 흔쾌히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생(生)과 사(死)의 관점 즉, 살아 숨을 쉬느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확실하게 죽은 게 맞다고 했다..

제몬드의 대답을 들어도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내 눈으로 어두운 밤에만 활동하며 생활하는 다소 기이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그들의 표정에 묻어나는 삶에 대한 활력을 보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의혹을, 그 질문을 제몬드에게 건넸다.

"역시 그대는 예리한 구석이 있군, 나는 몽마들의 왕 꿈을 먹고살고, 원하는 꿈을 이루어 주는 존재일세. 그들에게 그들은 죽었고 사자에게 자의식은 없네. 그저 그들이 그렇게 살아있기를 바라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염원, 그들의 꿈을 투영해 주었을 뿐."

"그렇다면 주문을 풀어주시오. 사자에겐 안식이 필요한 법이오."

'나이트메어 엔디드.'

예리한 내 질문에 제몬드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하며 나를 치켜세우며 답해주었다. 제몬드가 말은 모호하게 하지만 여태껏 한치도 틀어지지 않고 일관성 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바로 '마을 사람들은 이미 죽은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다른 몽마들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몽마들의 왕이고 그만큼 강대한 능력과 권능을 지닌 자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꿈속의 세상이 아닌 역병에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의 꿈, 자신의 이웃이 친구가 그리고 가족이 살아나 자신과 함께 울고 웃으며 다시금 활기찬 일상을 보내고자 하는 그 꿈을 그저 그들의 싸늘한 주검에 투영했을 뿐 되살아난 마을 사람들에게 자의식은 없었다.

나는 잠시간 고민하였다. 과연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꿈을 이대로 내가 멋대로 부수어도 되는 것인지 과연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한가지 뿐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안식이,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삶이 있는 법. 

나는 결심을 굳히고 제몬드에게 주문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남의 힘을 빌려 쓰는 것과 자기 능력을 그대로 사용 하는 것의 차이랄까?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가벼운 주문이 흘러나왔고, 이내 마을에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검은 안개들이 방안으로 점점 밀려들어 오더니 제몬드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대가 바라는 대로 주문은 풀었네, 그대는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군."

"과찬이오, 내가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확신 없는 확신이라... 그대는 참 흥미로운 인간이군, 아 혹 봉인의 매개체를 지니고 있는 자를 죽였는가?"

"아니오, 어찌나 도망치는 것이 어찌나 빠르던지 놓쳐버렸소."

검은 연기가 모두 그에게 빨려 들어가자 적막을 깨고 제몬드가 나를 다시금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의 칭찬에 나는 겸손이 아닌 진심으로 내가 잘한 결정인지 의문이 들었기에 대답했고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내 모습이 제몬드에게는 흥미로움으로 비친 듯 했다.

뒤이어 제몬드는 나에게 봉인의 매개체를 지닌 자를 죽였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결국 그자를 놓쳤음을 그에게 말했다. 제몬드는 이내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 그자의 생김새를 보았는가? 다른 건 아닐세, 그저 그자에게 책임을 묻고 싶을 뿐."

"왼쪽 관자놀이에 한 뼘만 한 뿔이 솟은 자였소."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제몬드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혹 그자의 모습을 보았느냐 물어왔다. 그의 되물음에 내가 의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갑자기 분위기와 태도가 바뀌며 그자에게 책임을 물으려 한다고 이야기 했다..

아마도 책임을 묻겠다 함은 곧 그의 보복이란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의 봉인을 풀지 않고 계속 이용했다면, 언젠간 저 분노가 나를 향했을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오한이 돌았다.

제몬드도 자신의 기운을 드러낸 것에 아차 싶었는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고, 나도 어차피 그의 분노가 나를 향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짧게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다잡고 뿔이 솟은 자의 특징을 말해주었다.

"혹 그자의 뿔이 몇 개였는가?

"내가 본 것은 한 개였소."

"뿔이라....호로스의 하수인인가...? 언제 이곳까지..."

"혹, 그자에 대하여 짚이는 바가 있소?"

뿔이 솟은 자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제몬드는 침음하며 조용히 혼잣말을 이어갔다. 드문드문 들리는 그의 혼잣말은 듣는다 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의 혼잣말을 끊으며 나는 제몬드에게 그에 대하여 아는 바가 있는지 물었다.

제몬드에게는 단순히 복수에 대한 문제겠지만, 우리는 봉인 능력이나 고위 마술까지 부리는 그자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나는 그자에 대해 마탑에 보고해야 할 의무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그런자가 음지에서 계속 활동한다면 크나큰 위협 이기에 그자에 대한 위협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내 짐작대로 그들은 '광신도'들일세, 자네가 본 것과 같은 뿔이 다섯개 솟은 자가 내가 말한 '호로스' 라는 자일세 인간의 세계로 따지면 제사장 같은 자이지. 우리의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아마 자네가 본 자는 뿔이 하나인 것으로 보아 그의 수많은 하급 제사장 중 하나일 걸세."

"호로스? 그리고 당신들의 신이라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소. 그럼 내가 본 자들과 같은 이들이 더 많이 있단 말이오?"

"우리의 신의 이름은 데카 톤, 수많은 마족 중에서도 유일하게 데카 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자가 방금 말한 호로스란 자일세, 하지만 그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아. 아니 존재할 수 없지. 그렇기에 마왕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아차..."

"마왕? 왜 말을 하다 마시오. 마저 말을 해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금제와 언약 때문에 많은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주시게. 솔직히 지금 그대에게 이만큼 얘기한 것도 위험한 수준이네. 다만 그대에게 한가지 정보와 한가지 언약을 해주도록 하겠네."

내 질문에 제몬드는 대답을 해주었다. 처음 그가 짐작했던 대로 이들은 광신도이며 그의 혼잣말에 언급되었던 호로스란 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내가 조우한 그 뿔이 솟은 자는 그저 하급 제사장에 불과할 뿐이라 했다.

그 정도 고위 마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단순히 하급 제사장에 불과하단 사실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고, 이내 그자보다 더 강대한 능력을 지닌 자가 또 존재한단 사실에 불안함이 엄습했다. 게다가 마족들의 신이나 호로스의 존재 같은 여러 정보들에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제몬드는 내 혼란을 알아차렸는지 차분히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흰 로브를 입은 자들이 외쳐대었던 데카 톤은 구호가 아닌 마족의 신을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빼놓고 설명하긴 했지만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의 수장인 호로스는 적어도 지금 뉴란드 대륙에는 존재할 수 없다 확언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아주 잠시 마왕이 언급되었고 재빨리 말을 정정하며 말을 아꼈다.

나는 그에게 계속 이야기를 할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잠시간 침묵하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준 정보들만으로도 금제에 굉장히 아슬아슬할 만큼 걸쳐있는 상태라 이야기하며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대신 나에게 말해줄 수 있는 다른 정보와 함께 정확히 언약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한가지 언약을 해주겠다 했다.

"우선 정보일세, 이 또한 금제와 내가 가지고 있는 언약에 굉장히 부담을 주는 내용이니 잘 듣게. 인간들은 마족이 토벌되었다 알겠지만, 이곳 뉴란드 대륙에는 나와 같은 마족이 상당한 수가 잠들어있거나 숨어있네. 그들은 자의로는 깨어날 수 없을 만큼 깊이 잠들어 있고, 너무 오랜 시간 잠들어 자신이 마족인지 모른 채 인간들 속에 숨어있는 자도 있을걸세. 그리고 이 광신도들이 나를 깨웠다는 건 이제 다른 마족들 또한 하나둘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이네.

"그렇다면 이 광신도들이 깨어난 다른 마족들을 모두 당신처럼 부릴 능력이 있소?"

"아니네, 나에게 행해졌던 것과 같은 봉인은 쉬운 일이 아니네. 다만, 내가 깨어났다는 것. 자세한 내막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깊은 잠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보면 되네. 즉 내가 깨어났다는 것은 곧 다른 마족들도 깨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네. 깨어난 마족들은 자의든 타의든 이제 활동을 시작할 것이네."

제몬드의 정보는 여태껏 알게 된 내용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이었다. 뿔이 솟은 자나 흰 옷을 입은 자들은 이미 상대해 본바 인간이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제몬드는 달랐다. 그의 힘은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강했고 그만큼 인간에겐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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