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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몰락한 귀족으로 살아남는 방법

236화 "뜻밖의 재회" - 리뷰 만물상

by 리뷰 만물상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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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 침입자는 순순히 체포에 응하라!”

“하아... 하아... 하아...”

“생포하라셨다. 포박하라!”

“하아... 젠장...”

결국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도주극은 끝을 맞았다. 뒤를 쫒던 추격대는 발이 빠른 이들을 추려 우리를 앞질렀고 결국 앞뒤로 포위당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개고생 하고 있는 와중에도 등에 업힌 무거운 근육 덩어리인 거한은 눈을 뜰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솔직히 아까 비탈린과의 전투 때 도와준 것만 아니면 진즉에 내다 버릴까 했던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턱’

‘스릉’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투항한다면 목숨은 부지할 것이다!”

나는 등에 업고 있는 근육 덩어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 망할 근육 덩어리는 이런 와중에도 곤히 잠든 듯 미동조차 없었다.

어깨와 등허리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니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까 치른 전투가 끝나자마자 오랜 시간 이 덩어리를 업고 도주하느라 너무 지쳤다.

그 결과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손발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주변에는 언뜻 보아도 수십, 아니 나무 뒤에 간간히 보이는 병력까지 합한다면 수백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의 목적이 우리의 즉결 처분이 아닌 생포라는 점일 것이다. 다만, 생포되어 간다고 한들 투르칸이 마족이란 것을 아는 이상 이후 결과야 뻔하지만 말이다.

결국 이번에도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싸우다 편히 죽거나, 나중에 마족에게 된통 당해 죽거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차라리 편안한 죽음이 나을 것이다.

죽음이 다가오니 카렌이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브람스의 열대 우림에서 허망하게 죽을 줄 알았으면, 카렌과 초야를 치르고 후사를 남겼어야 하나 싶은 허황된 생각도 들었다.

급박한 순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펼쳐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너무 좋지 않아 이렇게 잡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할 것만 같았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어쨌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카렌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개죽음이 될 것이기에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손은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긴 하지만 잡생각을 하며 시간을 끌어 조금이나마 호흡을 안정시키긴 했다. 숫자는 많으나 이들의 목적이 사살이 아닌 생포인 한 해볼 만은 했다.

내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동안 추격대는 밧줄과 제압용 막대, 그리고 방패를 내세운 체 서서히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부웅, 슥, 부우웅, 서걱’

“하아... 하아...”

‘부웅, 슥, 부우웅, 서걱, 부웅, 스걱’

“허억... 허억...”

추격대는 내 주위를 에워싸 돌며 제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밧줄을 던졌지만 휘둘러지기 시작한 내 검에 밧줄은 허망하게 잘려 나갔다.

그다음은 제압용 막대였다 역시나 제압용 막대 또한 다가오는 족족 검에 잘려 나가기 일수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방패들 또한 내 검에 의해 밀려나거나 잘려 나갔다.

처음은 그렇게 순조로웠으나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하나를 베어내면 둘이, 둘을 베어내면 셋이 수백의 병사들을 상대하기에는 내 실력도 체력도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내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이제는 시야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거의 본능에 의해 검을 휘둘러 막아낼 뿐 이제는 란탈로식 검술조차 펼치지 못했다.

“독한놈이군. 멈추지 마라! 목표는 지쳤다!”

‘부스스스스’

“누구냐!”

추격대의 지휘관은 영리하고 신중했다. 절대 병사들을 허투루 투입하지 않았고 일정 거리를 둔 채 내 체력만을 갉아먹었다.

그렇게 이제 추격대의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한 걸음만 남겨놓은 이때 추격대 뒤쪽에서 수풀이 흔들리며 무언가 접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쯤 되는 자가 당연히 이 소리를 놓칠 리가 없었고 몸을 돌린 그는 그 자리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대장의 목소리와 함께 돌아선 이들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크르르르르르. 크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괴... 괴물이다!!”

체력이 다해 시야가 어두워져 앞을 분간할 수는 없지만, 아직 귀는 열려있었다. 그렇게 내 귀에도 무언가의 포효소리와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인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털썩’

추격대의 진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당연히 나를 제압하려 날아들던 도구와 방패들 또한 멈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 또한 한 톨 남아있던 힘마저 다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허억...!!”

얼마나 의식을 잃었을까,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은 아까 있던 열대우림은 아니었다.

의식이 끊겼던 곳과 지금의 광경이 다른 점,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나를 에워싼 추격대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나는 추격대에 붙잡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켠으론 조금 의아한 게 붙잡힌 것 치고는 손발이 자유로운 게 구속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의아함에 주변을 둘러보자 의아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견고한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가죽을 둘러 세운 천막, 특별할 것 없는 천막 같아 보였지만 천막을 확인한 나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런 천막은 남부식이 아닌 제국식 천막이었다. 뜨거운 사막의 열기로 인해 가죽이 상하기 쉬워 남부의 천막은 가죽보다는 두꺼운 천을 이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부상으로 인해 의식을 잃은 게 아니다 보니 아무리 길어도 내가 의식을 잃은 것은 몇시간 내외일 것이다. 거기다 열기가 느껴지는 온도, 군데군데 깔린 모래로 보아 이곳은 아직 사크리파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나를 이리로 데려온 것이 사크리파 내에 있는 제국인이라는 것인데 그랑 후작에게서 브람스 내에서 제국의 조력자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스윽’

“정신이 드셨습니까?”

“당신은...? 여기에 어떻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는 도중 천막의 입구가 열리며 사람이 들어왔고 따듯한 목소리로 내 상태를 물어왔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막 내부로 들어선 인물은 나도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페니. 저를 구해준 게 페니입니까?”

“아니요,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요. 드라바덴님과 아드나가 백작님을 모셔 온 겁니다.”

“드라바덴이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저는 그저 따라다닐 뿐 사정은 잘 모릅니다. 드라바덴님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이는 페니였다. 제국 북부의 거대한 늑대, 푸른 갈기 일족의 정당한 후예라 말하는 마족과 계약한 아이의 엄마였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육체에 공생하는 마족 드라바덴과 함께 동행하고 있던 듯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선택이긴 했지만, 그때 내 영지로 가자는 제안을 거절한 드라바덴은 자신은 할 일이 있다고 했었다.

당시에 드라바덴은 자신에게 저주를 건 자를 죽여 끔찍한 저주를 끊어내겠다 했었다. 그랬던 드라바덴이 여기 있다는 것은 드라바덴에게 저주를 건 마족이 브람스, 아니 사크리파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투르칸 하나로도 복잡한데 또 새로운 마족까지 예상되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우선은 사실확인이 필요했다.

페니와 아드나 그리고 드라바덴이 왜 이곳에 있는지 그녀에게 물으려던 찰나, 천막의 입구가 걷히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한 소년이 걸어들어왔다.

“정신이 들었는가 인간.”

“덕분이오 고맙소.”

“ㄱ... 잠시 있어봐라 내가 이야기 중이다.”

“?????”

예전에 보았을 때는 여덟살 남짓했던 꼬마 아이였던 모습이 몇 년 사이에 부쩍 자라 아이 티를 벗고 이제 소년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키가 많이 자라기도 했고, 마족의 영향인지 몰라도 아직 어린만큼 선은 가늘지만 가는 신체 속에 제법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 잡은 듯 보였다.

하지만 나름 분위기 있어 보였던 그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치 자아가 분열하듯 눈동자 색이 여러 번 바뀌면서 허공에 혼자 발버둥 치던 드라바덴은 다시 무게를 잡고 말을 이었다.

“하아... 아드나가 몸은 어떠냐고 묻는군.”

“아드나에게도 고맙다 전해주시오. 덕분에 살았다고.”

“입은 하나라 한명이 말하지만, 귀는 둘이라 이미 들었다. 하아... 예쁜 누나인지 몰랐다고 남자로 오해해서 미안하다는군. 그건 나도 놀랍긴 하군 인간 암컷 중에 그대 같은 자가 있을 줄이야. 말투며 행동 때문에 수컷인 줄 알았다.”

“하아... 그게 말이오...”

역시 몇 년 사이에 몰라보게 크긴 했어도 아드나는 이제 십 대 초중반 즈음 되는 소년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예전보다 장난기와 호기심이 왕성한 듯 드라바덴에게 순응하던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아마 인간과 마족이 서로 적대하지 않고 서로를 같은 동등한 개체로 인식하여 공존한다면 지금 드라바덴과 아드나의 모습이 그 이상적인 형태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탈출 과정에서 이리저리 찢겨 거의 의복의 기능을 하지 못했던 옷이 갈아입혀졌기에 의식하지 못했건만 이미 여럿에게 많은 오해를 산 듯 싶었다.

드라바덴이야 관심 없다는 듯 무표정했지만 오해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소년의 볼이 붉어진 것이 한창 성에 흥미가 있을 나이의 아드나 또한 내 몸을 보고 단단히 오해를 한 듯 싶었다.

그만큼 바탈린의 변장술은 정교하기도 했고 섬세했다. 물론, 탈부착이 쉽지 않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어쨌든 오해는 풀어야 하기에 나는 애써 그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역시 인간들에겐 배울 점이 많군. 그대가 내게 준 폭주를 막는 약에서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말이다.”

“하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이상하다 오해할까 겁났소. 아! 나와 같이 있던 근... 아니 남자는 보지 못했소?”

“남자라면 그대보다 먼저 깨어났다. 구할 것과 알아볼 것이 있다더군.”

다행히도 오해는 잘 풀렸다. 괜스레 몇 안 되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마족이 인간을 이상하게 오해하거나 소년에게 이상한 성적 취향(?)을 눈뜨게 할뻔한 사건은 무마되었다.

오해가 풀리자 뒤늦게 근육 덩어리, 거한에 대한 일이 떠올랐다. 원래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깜빡하는 편은 아닌데 고생이 심해서 진짜 내다 버리고 싶었던 거 같다.

어쨌든 내 생각대로 드라바덴에 의해 거한도 나와 같이 구출되었고, 예상한 대로 거한은 무사했다. 보통 첩자나 암살자들과 같이 독과 친숙한 이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독에 대한 내성을 키워 놓는다.

바탈린이자 바탈린들을 키워냈다 하는 거한 또한 당연히 어느 정도는 독에 내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고 의식을 차리자마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도시로 내려간 듯 보였다.

“그나저나, 이곳까진 어떻게 온 것이오?”

“저주의 흔적을 쫒아왔다. 인간 그대의 도움이 컸지.”

“내 도움말이오?”

“그렇다 인간.”

“그날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질 않소?”

“맞다. 꼭 만나야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 인간 그대 덕분에 광신도 녀석들의 활동이 제한되었다. 덕분에 눈을 피해 국경을 넘을 수 있었지.”

오해도 풀고 인사도 나눴으면 이제 이들이 여기 왜 있는지에 대해 알아야 했다. 말했듯 투르칸 이외의 또 다른 마족의 등장이라면 가볍게 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드라바덴은 자신에게 씌인 저주를 풀기 위해 흔적을 쫒았다고 했다. 흔적은 남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흔적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을 거듭했지만, 국경에서 막혔다고 했다.

뜬금없이 나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었지만, 그의 이야기와 시간대를 생각해보니 그가 말한 내 도움에 대해 납득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국은 듀발 후작의 손 아래 놓여있었고, 듀발 후작은 마족, 나아가 그 마족들을 통제하려는 뿔이 솟는 자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다.

알기로 뿔이 솟은 자는 한명이 아니고 대륙 각지에서 활동하지만,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듀발 후작을 포섭했기에 아마 제국에서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을 것이었다.

당연히 뿔이 솟은 자는 듀발 후작을 통한 제국 내 영향력으로 마족을 쫒았을 테니 드라바덴 입장에서는 굳건한 제국의 국경을 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마족의 소멸과 듀발 후작의 희생으로 뿔이 솟은 자는 삽시간에 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 그 틈을 노려 드라바덴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저주의 대상, 그대가 죽여야 할 마족이 이곳 사크리파에 있소?”

이들이 여기까지 온 과정을 알았으니 당연히 다음 수순은 이들이 여기에 있는 목적 차례였다. 어차피 숨길 이유가 없다면 나에게 감추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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